

#56 시내, 10년 전 주말
거리를 걷는 18세 우성은 기분이 매우 좋다.
비록 흰 티에 청바지일 뿐이지만 길을 걷다가 매장 유리창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기도 한다. 기분처럼 하늘도 맑고 푸르다.
제대로된 데이트는 처음이라 마음이 설렌다. 저번에 서울에서 했던 데이트도 좋았지만, 그때 것은 데이트라고 치기 싫다. 명헌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후인 지금,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지 기대된다.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서 명헌을 기다린다. 아이돌같이 잘생기고 큰 키 덕에 시내로 놀러온 소녀들이 흘끔대고 저들끼리 깔깔대기도 한다. 그러다 소녀들 중 머리를 똑 단발로 자른 이쁘장한 소녀가 정우성에게 다가가 묻는다.
소녀
너 산노고 정우성 맞지.
우성은 목을 빼며 명헌을 기다리느라 소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다.
우성
어? 어.
소녀
난 옆 여고에 다니는데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번호 좀 줄 수 있어?
소녀가 알록달록한 스티커를 가득 붙여놓은 고아라폰을 내민다. 그제서야 소녀를 쳐다보는 우성. 이러다 명헌이 보게 될까 봐 겁나지만 한편으론 봐줬으면 좋겠다는 양가감정에 빠진다.
우성
(어깨를 쫙 피며)
미안.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소녀는 우성의 말을 듣고도 당당하게 말한다.
소녀
좋아하는 거지 아직 사귀는 건 아니잖아?
우성
(새침하게)
이제 곧 사귀게 될 거거든?
소녀
뭐야. 그 사람도 너 좋아한대?
우성
(발끈하며)
나 좋아하는 거 맞거든? 우린 키, 아, 아무튼 좋아하는 거 맞아.
소녀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알았어.라고 대답하고 친구들과 함께 사라진다.
우성은 혹여 명헌이 이 광경을 보았을까 봐 두리번거리나 아직 명헌은 도착하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명헌을 계속해서 기다리는 우성.
30분 후 .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명헌에게 전화를 거는 우성.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가 나면 음성사서함으로 - ]
1시간 후.
다시 전화해봐도 받지 않고 계속 음성사서함으로 이어진다.
3시간이 흐른 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우성.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린다.
마지막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 핸드폰 플립을 탁 닫고 어깨가 축 처진 채 빗길을 쓸쓸히 걸어간다.
#57 연극부실, 다음날
우성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극부실부터 달려간다.
문을 드르륵 열어젖히고 명헌 선배! 를 외친다.
그러나 그곳엔 명헌을 뺸 현철과 낙수, 동오와 성구만 있다. 우성은 다짜고짜 그들에게 다가가 명헌을 찾는다.
우성
선배, 명헌 선배는 아직 안 왔어요? 저 할 얘기 있는데.
그러자 현철은 당황스럽고 어두운 얼굴을 한다.
현철
그게......
우성을 제외한 4명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낙수
명헌이 전학갔대.
우성
(귀를 의심하며)
네?
동오
우리도 좀 많이 당황스럽네. 명헌이가 갑자기 전학갔다고 오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우성
(충격 받은 표정으로)
갑자기 전학이요? 왜, 왜요?
성구
모르겠어. 우리한테 말도 안 해주고 떠났으니까. 어떤 사정이 있겠지.
콰과광. 효과음과 함께 우성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58 대학로 극장 근처 건물, 현재
비에 젖어들어가는 티켓을 쥐고 명헌을 한참동안 바라보는 우성.
그는 티켓을 움켜쥐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뒷모습을 보이며 길거리를 성큼성큼 걸어간다.
#59 대학로 극장 앞, 1시간 후
여전히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명헌 앞에 성희가 나타난다.
명헌의 얼굴이 창백해 보이자 성희가 깜짝 놀라며 말한다.
성희
어머 이 대리님! 괜찮으세요? 이 땀 좀 봐.
한참동안 우성을 기다리던 명헌은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성희를 바라본다.
명헌
괜찮습니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겠네요.
아무래도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으려나 봐요.
성희
정말요? 그런데 어떡하지...... 저 대리님께 안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대리님. 괜찮으시면 잠깐 카페에 앉아 있다 가요. 따뜻한 것도 마시고. 응?
머뭇거리던 명헌은 성희의 열렬한 권유에 하는 수 없이 카페로 걸음을 뗀다.
#60 카페 안
바깥은 부슬부슬 비가 오고 카페 안은 부드러운 음악 선율이 흐른다.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은 명헌과 성희.
각자 앞에 놓인 따뜻한 라떼와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씩 들이킨다.
성희
올해는 장마가 참 일찍 온 것 같아요.
명헌
(창 밖을 바라보며)
......그렇네요. 이젠 비가 그칠 때도 됐는데.
한동안 말 없이 앞의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두 사람.
성희
이 대리님.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죄송해요.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명헌
......
성희
비록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는 해보지 못했지만요, 제 마음을 대리님께 전달하기엔 충분했던 것 같아요.
명헌
......
성희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러고 보면 인생은 한 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명헌
......
성희
모든 일상은 타이밍에 따라 흘러가잖아요. 일견 평범해보이는 저같은 사람의 사랑조차도요.
전 이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무대 위에서, 명헌 씨를 사랑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진 이 찰나를요.
그래요. 전 그 역할을 맡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명헌은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살짝 불안해진 성희가 명헌을 재촉한다.
성희
대리님......?
명헌
성희 씨 말이 맞아요.
성희의 얼굴이 환해진다.
명헌
성희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성희, 환하게 웃다가 멈칫한다.
명헌
성희 씨 말대로, 한낱 우리 같은 인간에게 신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역할을 부여하셨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성희
......
명헌
저는 사실 운명적 사랑이 있다고 믿어요.
그런데요, 운명이란 건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더라고요. 참 진부한 얘기죠?
하지만 진짜예요. 우리가 역할을 따내기 위해서 오디션을 봐야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도 기회를 잡아야 하는 거죠.
성희
이 대리님......
명헌
그래서 성희 씨도 나를 쟁취하기 위해서 이걸 기획한 거겠죠?
명헌은 벌떡 일어나 성희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성희 귀에 꽂힌 인이어 수신기를 빼낸다.
소스라치게 놀란 성희는 어쩔 줄 몰라하나 명헌은 그 인이어를 귀에 꽂고 비 오는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CUT TO. 카페 밖
명헌
우성
카페 처마 밑엔 다름아닌 우성이 무전기를 손에 들고 서 있다. 주머니에 무전기를 찔러넣은 우성은 비 오는 길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명헌
우성아.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는 우성.
명헌
정우성!
달려가서 우성의 팔을 잡았으나 그는 홱 뿌리친다.
휘청거린 명헌은 다시 우성의 팔을 붙잡는다.
명헌
우성아,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
우성이 뒤 돌아서 서글픔과 분노가 담긴 얼굴로 쏘아붙인다.
우성
내가 요 며칠 형 받아주니까 등신으로 보여요?
명헌
그런 거 아니야. 나 할 말 있어.
우성
전 들을 말 없어요.
다시 뒤돌아가려는 우성을 강하게 잡는 명헌.
명헌
내 얘기 한 번만 들어줘. 한 번만.
우성
들을 말 없다니까요!
명헌
소원, 지금 쓸게. 네가 진 사람 소원 들어준다고 했었잖아. 너도 기억하잖아.
멈칫한 우성은 비로소 천천히 명헌을 마주본다. 빗발 때문에 두 사람의 전신이 젖고 눈꺼풀엔 빗방울이 매달린다.
우성
얘기한다고 뭐가 달라져요? 이제와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명헌
네가 그랬지. 넌 나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네가 성희 씨를 통해서 한 말, 전부 네 진심이라고 생각해도 돼?
우성
진심 아니에요. 선배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나는 그런 운명적 사랑따윈 없어요. 전 그저 제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에요.
선배는 내 마음을 짓밟았잖아요. 사랑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댔죠? (심호흡을 하며) 맞아요. 선배는 이미 날 떠났을 때부터 타이밍을 놓친 거예요. 진심이고 나발이고, 선배는 극을 다 망쳐버린 거라구요.
명헌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다.
명헌
(시선을 맞대며)
우성아. 너 나 사랑하잖아.
왜 네 사랑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말해?
우성
(울컥하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선배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기나 해요?
왜 약속 안지켰어요, 왜 왜! 그때 깐풍기 사준다고 해놓고 왜 안 사줬어요! 그럴거면 애초에 잘해주지 말든가! 자장면 비벼주질 말든가!
날 좋아한 적 있기는 해요?! 선배는 날 갖고 놀았던 거죠!
명헌
그렇지 않아!
우성
거짓말 마요!
명헌
학생주임 선생님이 보셨어.
우성
네?
명헌
.....그날 우리 둘이 있던 거, 학생주임 선생님이 보고 우리 아버지께 말했다고.
#61 10년 전, 19살 이명헌 집.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명헌에게 다짜고짜 뺨을 갈기는 명헌의 아버지.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 명헌, 뺨을 움켜쥐며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명헌의 아버지는 머리 끝까지 화가나서 호통을 친다.
명헌의 아버지
학생 주임 선생님께 다 들었어! 학생이 말야, 공부하라고 학교에 보내놨더니 남자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해?!
명헌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는다.
명헌의 아버지
딴따라짓 몰래 하는 것도 자식이라고 눈감아 줬는데,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명헌
......
명헌의 아버지
너랑 어울린 그 놈 자식 이름이 뭐야. 학교에 전화해서 당장 퇴학시키라고 해야겠다.
명헌의 아버지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 것처럼 굴자 명헌은 헐레벌떡 일어나 아버지 팔에 매달린다.
명헌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명헌의 아버지
이거 안 놔!
명헌의 아버지가 뿌리치자 바닥에 나뒹굴지만 다시 다리를 붙잡고 매달린다.
명헌
정말이에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연기도 그만둘게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잘못했어요.
약간 누그러진 명헌의 아버지는 명헌의 어머니에게 불호령을 내린다.
명헌의 아버지
여보! 저 놈 자식 핸드폰 뺏어서 방에 가둬 놔. 애비 낯 뜨겁게 하는 자식은 학교도 갈 필요 없어.
명헌
......
명헌의 아버지
연기도 그만 둬! 학교도 애비가 가라는 대로 당장 전학 가! 그러게 진작 실업계 가서 기술 배우고 취업이나 했으면 좋았잖아! 딴따라짓이나 하니까 그런 더러운 것에 물들지. 쯧쯧쯧.
명헌은 핸드폰을 반납하고 무언가를 포기한 얼굴로 조용히 방에 들어간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두 팔에 얼굴을 파묻는 명헌.
#62 카페 밖, 현재
우성
왜...... 왜 말 안했어요?
우성은 비를 맞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우성
왜 말 안했냐구요.
나중에라도 털어놓을 수 있었잖아요.
명헌 역시 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어 대답한다.
명헌
......난 널 떠난 적 없다고 생각했어.
우성
뭐라구요?
명헌
우린 잠깐 멀어졌을 뿐 서로를 떠난 게 아니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의 무대에 조명이 켜지리라 믿었거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우성
씨발, 웃기는 소리 하지 마요!
우성은 답답한 나머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명헌의 반대 쪽을 향해 악! 소리를 지른다.
우성
도대체 어디까지가 선배의 진심이고 가짜예요!
선배는요, 그냥 무서웠던 거잖아요. 두려웠던 거잖아요.
먼저 날 내친 주제에 그런 태평한 소리가 흘러나와요?
명헌
......
우성
말해보라구요!
명헌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한다.
명헌
......맞아. 난 너무 두렵고 어렸어.
그래서 네 이해를 일방적으로 바랐지. 나 혼자 김칫국 마시는 줄도 모르고.
그런데 정우성.
명헌이 한 손으로 우성의 한쪽 뺨을 쓸어내린다.
명헌
난 단 한 번도 네 앞에서 거짓을 연기한 적 없어.
전부 진심이야.
그저 타이밍이 어긋났을 뿐, 내 마음은 항상 같았어.
두 사람 사이를 침묵이 가로지른다.
우성은 명헌의 두 어깨에 손을 얹고 시선을 맞댄다.
그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열렬하고 에너지 넘친다.
우성
솔직히 난 아직 선배란 사람을 잘 모르겠어요.
선배가 말했던 운명적 사랑이란 게 있는 지 없는지, 그런 것도 잘 몰라요.
사랑이니 연애니 그딴 거 다 지긋지긋해요.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싫고요.
명헌
......정우성.
우성
그런데요,
하지만 선배라면, 선배와 함께라면 운명적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그 쓰잘데기 없는 거! 선배랑 해보고 싶다고요! 아, 젠장!
명헌의 눈가가 붉어진다.
명헌
……미안하다.
우성
솔직히 나 아직도 화나 있어요. 용서해줄지 말지는 좀더 생각해 볼게요.
명헌
......알아. 내가 잘못했어.
우성
다시는 도망가지 마요. 알았어요?
입술을 떨며 고개를 끄덕이는 명헌. 우성의 어깨를 끌어안고 귀에 속삭인다.
명헌
졸지에 시라노 역까지 맡게 해서 미안해.
우성
됐어요. 그래도 선배가 원작처럼 크리스티앙을 좋아하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명헌
(빙긋 웃으며)
나는 언제나 시라노를 사랑하고 있었어.
우성
이만큼 잘생긴 시라노 봤어요? 실제 록산도 시라노가 나처럼 생겼으면 크리스티앙한테 눈길도 안 줬을 걸요.
마주 보고 웃은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차가워진 두 입술을 맞댄다.
빗줄기가 차츰 약해지더니 똑똑 소리를 내며 멈춘다.
음악이 흘러나오며 두 사람으로부터 카메라가 점점 멀어진다.
우성(V.O)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일 뿐이다.
대본은 없지만, 각자의 역할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난 이명헌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63 산왕 사무실
짐 박스들이 높게 쌓여 있고 물건과 가구들이 텅 빈 사무실.
현철과 낙수, 동오과 성구는 시원섭섭한 얼굴로 사무실을 둘러본다.
성구
우리의 산왕 연애 조작단도 정말 끝이 났네.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유종의 미는 거뒀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는 건가.
낙수
유종의 미는 무슨. 결국엔 정우성 저 새끼가 또 타깃을 꼬셨잖아.
동오
뭐 이번엔 지도 좋다니까. 어쩔 수 없지.
성구
사람 일은 가끔 보면 영화나 연극보다 더 재밌어. 안 그래?
에휴, 나가자. 나가서 냉삼에 소주나 먹자.
가방을 챙겨들며 나갈 채비를 하는 동오, 성구, 낙수. 반면 현철은 움직이지 않는다.
동오
(뒤돌아보며)
넌 안 가게?
현철
아 난 좀 정리할 게 있어서. 먼저 가서 먹고들 있어.
낙수
정리할 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까지 해. 하여간 단장 아니랄까 봐.
그럼 우린 가서 시켜놓고 있는다.
현철
어. 먼저 가 있어.
셋이 떠나고 적막한 사무실 안. 현철은 기지개를 핀 후 허리에 손을 얹고 여러가지 추억과 회한이 물씬 담긴 표정을 짓는다.
불현듯 며칠 전의 일을 회상하는 현철.
#64 포장마자, 며칠 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현철과 명헌. 그들 앞에는 다 식은 오뎅탕과 빈 소주병이 높여 있다.
현철
(소주병을 기울이며)
감기 걸린 건 괜찮냐?
명헌
응.
현철
빗속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감기 안 걸리는 게 이상하지.
명헌
너한텐 신세 많이 졌다.
현철
고마우면 오늘 술은 네가 쏴라.
명헌
당연하지.
말없이 소주를 들이키는 두 사람.
현철
(망설이다)
네 연락 받았을 때 사실 많이 놀랐다.
명헌
......
현철
말은 못했지만 우성이가 그동안 참 많이 힘들어 했어.
오죽하면 걔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을 못해봤겠냐.
그래도 지금은 둘이 잘 돼서 다행이다만.
명헌
......
현철
네 부탁대로 하긴 했다만, 꼭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지났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하다못해 우리한테라도 연락하지 그랬어.
명헌
......연기 중이었거든.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턱을 괴고 말을 이어가는 명헌.
명헌
아버지가 나보고 연기를 그만두라고 했지만 난 연기를 그만둔 적 없어. 난 오히려 완벽하게 연기를 해내리라 생각했어. 정우성을 버리고, 너희를 버리고, 연기를 버린 연기를.
현철
......
명헌
봐 줘.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널 찾아온 거니까.
현철
......가끔 널 보면 도통 알다가도 이해 못하겠다.
정우성 한테 솔직히 말하면 될 걸 굳이 이렇게 판을 만든 것도 그렇고. 하여간 넌 이상한 놈이야.
소주잔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명헌은 실소를 지으며 현철의 잔에 건배를 한다.
명헌
연기는 원래 이상한 놈들이 하는 거잖아.
#65 산왕 사무실, 현재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회상에서 깨어난 현철. 슬라이드를 열어 전화를 받는다.
우성
형, 어디예요! 아직 사무실이에요? 빨리 와요! 고기 식어요!
현철
오냐 알았어. 곧 간다.
전화를 끊은 현철은 조명이 켜진 사무실 안을 둘러보며 피식 웃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은 그는 조명을 끄고 사무실 문을 닫는다.
조명이 꺼진 사무실은 암흑으로 물든다.
Fade out.
Fin.
Nina, I cursed you, hated you, tore up your letters and photographs, but I’ve always known that my soul is bound to yours forever. I don’t have the strength to stop loving you, Nina. Ever since I lost you, my life has been unbearable — I’m suffering… My youth seems to have vanished. I feel like I’m ninety years old. I call your name, I kiss the ground you walk on; I see your face everywhere, I see that tender smile, which used to shine on me in the best years of my life.
- 안톤체홉 [갈매기] 뜨레플레프 독백 원문
-
Where is Demetrius? O, how fit a word
Is that vile name to perish on my sword!
- 셰익스피어 [한 여름 밤의 꿈] 라이샌드 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