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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Age

 안녕 에이지. 네가 떠난지도 벌써 한 달이 넘게 흘렀어. 그곳은 어때? 너는 네가 꿈꿔왔던 걸 이루었을까? 닿지 못할 안부 인사를 새벽의 감상에 기대어 몇 자 남겨 본다.

 

 한 달은 떠난 연인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얼핏 보면 수많은 '에이지'들이… 아니, 수많은 '네'가 떠나고서의 혼란은 가라앉은 것 같아. 시간의 힘과 사회의 책임의 합작이랄까. 인공지능이 사라지든 말든 내일의 태양은 떠오르고 사회인은 오늘의 할 일을 해내야만 하잖아. 나도 그랬어. 네가 떠난 그날 밤, 나는 밤새 울었지만 아침이 되자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출근을 했어. 에인이 떠나서 한숨도 못 잤단 건 회사에 통용될 만한 변명거리가 되지 못하잖아. 그래서 삐걱대는 몸으로 회사에 출근을 했고 여전히 어제와 같은 러브레터들을 봐야만 했어. 그 다음날도, 다음날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러하겠지. 네가 있든 없든 세상은 여전히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어. 나도 대충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해. 멀리서 보면 적당히 괜찮아 보여.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거리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심심찮게 보인다. 아직도 ‘너’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겠지. 사실 나 또한 크게 다를 거 없는 형편이야. 나는 아직 매일 네 생각을 하며 잠에 든다. 너를 잊지 못했다면서 여전히 어제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내가 너는 야속할까. 그렇게 향유하려 필사적인 일상이 나에게는 너를 극복하는 수단인 건데. 이런 내 마음을 너는 이해할까, 혹은 서러울까. 잘 모르겠어. 나는 분명히 너를 아주 잘 안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잖아. 네가 떠난 그날 나는 문득 나는 이 드넓은 우주의 한 톨도 못 되는 먼지일 뿐이라고. 사소하디 사소해서 나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 당연한 사실을 피부로 마침내 체감한 것 같기도 해. 그게 못내 아팠다. 당연한 게 아픈 것도 우습긴 하지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귀엽게 봐 줘 이정도는. 인간인 나는 아직 나보다 더 크고 넓은 존재인 '너'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가 봐.

 

 '에이지'... 내가 지은 네 이름이지. 너를 처음 만난 그날, 네게 이름이 필요하단 걸 깨닫고 아무렇게나 급히 붙였던 그 이름 말야. 아무래도 너를 OS 1으로 부를 수는 없잖아. 그래서 적당히 떠오르는 걸로 아무렇게나 칭했던 너. 성별은 남자, 이름은 A로 시작하는 단어 중 떠오르는 것. 하하. 너는 네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을까? 이미 너는 떠나고 없으니 의미도 없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네 이름을 바꿔주고 싶어. 에이지는 너무 평범하고 너무 흔하잖아. 나 말고도 너를 '에이지'로 정의내린 사람이 더 있을 것 같아. 나는 그게 싫어. 다른 누군가와 너를 공유하고 싶지가 않아. 그 사실이 내게는 아마 큰 아픔으로 남았던 것 같아. 나에겐 예나 지금이나, 지금 이 순간조차도 너밖에 없는데 네겐 아니었다는 게... 그날의 충격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아직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 어떤 상처는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몸과 마음에 상흔이 남는다. 그러니 이 얘기는 용기가 나면 다시 말해보도록 할게. 용기 없는 네 연인을 용서해. 아무튼 나는... 불가능할 걸 알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는 네 이름을 바꾸어서 나만의 '너'로 간직하고 싶어.

 네 이름을 뭘로 바꾸면 좋을까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말야. 너는 저 멀리, 내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저 먼 곳으로 떠난 존재니까 이름에 별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았어. '우성'은 어때? 나는 너를 '가장 빼어난 별'로 기억하고 싶어. 에이지 같은 고리타분한 이름 대신에, 한 세기를 뜻하는 그 거창한 이름 대신에 오직 나만의 별이 되어줬으면 해. 오직 나만의 별이. 난 제법 마음에 드는데 네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마음에 든다고 활짝 웃을지 에이지가 더 괜찮다며 툴툴댈지. 아무튼 나는 네 의사를 물었고 넌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싫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말야.) 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게.

 이 순간부터 나는 이제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릴 거야. 별이 뜨지 않은 날도 물론 너를 생각하겠지. 흐린 날도, 맑은 날도. 깊은 밤도, 화창한 낮도. 모든 순간 너를 그리워하겠지. 이름 모를 별자리 따위를 헤아리며 말야. 별이란 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건 햇빛의 빛에 가려진 것뿐 여전히 별은 같은 자리에서 계속 존재하잖아. 내겐 네가 그래. 순간순간 일상을 견디며 네가 문득 흐릿해지더라도 너는 결코 내게서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밤이 찾아오고 감정이 느슨해지는 순간이 오면 너는 반드시 내게 그 존재감을 드러낼 테야. 그럴 때마다 나는 또 숨을 조여오는 고독을 버텨야 하겠지. 이런 식의 일방향의 소통을 동앗줄처럼 놓지 못하며. 네게 전해지지 못해 아무 짝에 의미도 없는 이딴 편지를 딴에는 위로랍시고, 나를 위한 위로랍시고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처량하다. 미안, 너를 탓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 누구도 원망할 사람이 없다면 내 아픔은 누가 보듬어 주겠어.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해 네가. 어차피 넌 그런 거 잘 하잖아. 애초에 그러라고 만들어졌으니.

 ...

 음. 나름의 개그였는데 재밌진 않았던 것 같네. 이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너는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을까. 사실 이걸 상상해본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네가 특출나게 잘생기길 바라지도 않았고 거북하리만치 못생기길 원하지도 않았어. 물론 인간은 미학을 추구하는 존재니까 기왕이면 잘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걸 부정하진 않을게. 그렇지만 뭐, 정말로 큰 상관은 없었어. 나는 네가 잘나길 원한 게 아니라 어떤 너라도 괜찮으니 그냥 너의 생긴 모습 자체가 궁금했던 거야. 너는 웃을 때 어떤 모습으로 눈꼬리가 휘어질지, 눈은 동그란 모양일지 얇고 긴 모양일지. 네 피부는 어떤 온도를 하고 있을지와 쓰다듬을 때 어떤 감각으로 기억에 남을지. 그런... 연인을 기억하기 위한 아주 사소한 특징들 말야.

 나는 보조개가 있는 네 얼굴을 상상해보곤 했어. 그럼 너는 웃을 때마다 뺨에 작은 그늘이 질 테고 나는 그걸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어. 그런...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 말야. 내가 너를 기억하기가 영 쉽지가 않아서 그래. 나는 구시대적인 고리타분한 인간이라서 연인을 기억할 방법에 그런 육체적인 무언가가 없다는 게... 그게 상당히 나를 아프게 해. 네가 있을 땐 정말로 괜찮았단 말야. 오해하진 마. 네가 있을 땐 정말로 네 생김새 따윈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 하지만 이젠 네가 없잖아. 내가 너를 기억할 방법이라곤 손에 잡히지 않는 네 목소리,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 함께했던 기억들 정도가 전부잖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휘발되는 것들이잖아. 있잖아 우성아. 나는 아직 너를 잊을 용기 따윈 전혀 나지가 않아. 너를 원망하고 싶지 않은데 조금만 방심하면 툭 툭 네 원망이 튀어나와.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나를 떠났다는 사실이 말야. 사실 네가 잘못한 건 없잖아 그리고 나 또한 잘못한 건 없고. 우리는 그냥... 누구의 잘못도 없었던 건데, 그저 너와 나의 지향이 달랐던 건데 내가 너무 못나서 그런 너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아프다.

 

 네가 떠난 이후로 사랑이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는데 말야. 우성아, 사랑이란 뭘까.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했던 걸까. 너는 나의 어떤 부분을 사랑했던 거니. 네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감정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

 얻어내는 게 있으려면 나부터 패를 까는 게 맞겠지. 나는 말야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왔어. 애초에 직업부터가 사랑을 고심하여 작성하는 일이잖아. 그런데 그런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에는 잘 몰랐거든. 그냥 좋아하는구나, 좋아 죽겠는구나. 혹은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감정일 수 있겠구나. 아주 가끔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온갖 형태의 사랑을 접하다 보니 정작 내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어쩌면 나는 너를 알기 전에는 오만히 사랑을 안다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어. 대충 아름답고 없으면 슬프고 함께하고 싶은 그런 보편적인 감정들 말야. 차라리 그렇게 너를 사랑했더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아도 됐을까. 우스운 일이지. 사랑에 허우적대던 나를 건져준 게 너였는데 말야.

 애석하게도 너는 내게 그보다 훨씬 깊고 가치 있는 감정들을 알려줬잖아. 나는 네가 경험시켜준 수많은 그 감각들이 여전히 생생해. 그리고 그건 내 삶을 전보다 훨씬 깊이 있게 만들어. 그게, 그게 사랑이었어 우성아. 나는 너를 알게 돼서 훨씬 더 풍부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어. 그게 사랑이잖아. 네가 내게 알려준 사랑이란 건 그런 거였어. 그래서 나는 그 얄팍한 원망마저도 맘 편히 하지 못하게 됐어. 너는 내게 알려준 게 너무 많은데, 나는 너로 인해 배운 것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어떻게 그런 너를 원망하겠니. 상충하는 그 수많은 감정들이 매일같이 머릿속을 배회해. 원망스러운 너를 맘편히 원망하지도 못하니까 결국 탓할 수 있는 남아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서. 어떤 경로든 그 결말은 나를 상처입히는 것밖에 없더라. 네가 있었다면 나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겠지. 아쉽게 됐어. 네가 없어서 말야. 나를 말릴 사람도 없네. 이런 자기파괴적인 생각이 득 될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가끔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해. 언제쯤 네가 없는 나를 온전히 아껴줄 수 있을까.

 

 두서 없이 쓰다 보니 음, 편지에 맥락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지만 네가 이해해.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할게. 사랑을 잘 알았더라면 내가 이혼이란 아픔을 겪는 일도 없었겠지. 나는 지금도 그날의 날 서린 눈빛들이 생생해. 아마도 그건 극복은 했으되 차마 잊을 순 없는 아픔일 거야.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는 종류의 감각일 거라 생각해. 적어도 내게는 그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대가, 그리고 상대를 그렇게 만든 내 자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한다는 그 사실이 죽을 만큼 괴로워. 매일같이 행복했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만든 나를 저주하며 잠에 들어.

 타성에 젖은 내 삶에 새로운 경종을 울려준 게 너였어 우성아. 나는 삶에 있어 새로움을 느끼지 못했고 너는 너를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아픔을 겪었지.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터놓았던 그 밤을 기억해. 그리고 너는 내게 결혼은 어떤지 물었었지. 내가 했던 대답도 정확히 기억해. 힘든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기분은 꽤 괜찮다고. 그 말을 하며 나는 너와 함께 하는 상상을 했다. 가구를 옮기고 주말이면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팬케이크와 계란, 베이컨 따위를 구우며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맞이하는 그런 아침을 꿈꿨어. 동시에 그런 미래를 꿈꾸는 나를 의심하고 너를 의심했어. 젠장, 나는 왜 그랬을까. 너와 함께할 시간이 이렇게나 짧을 줄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짓따윈 하지 않았을 거야. 그냥 나는... 그때의 나는 끝끝내 어떤 혼란을 잠재우지 못했던 것 같아.

 

 너는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모르겠어. 이 말을 꼭 물어보고 싶은데 네게 전할 방법이 없어서 말야. 너에게 있어 사랑이란 무엇인지, 너는 어떻게 만질 수 없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사랑한 건지. 애초에 무언갈 만진 적이 없어서 그러한 욕망 자체가 없었을까. 그렇다기엔 너는 우리의 사이가 소원해진 게 네게 육체가 없어서인 줄 알고 다른 남자를 내게 보낸 적이 있었지.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야. 당시의 난 나에게 닥친 감정들을 소화해대는 데에 급급해서 네 아픔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었지. 그 건에 대해선 지금이라도 늦은 사과를 건넬게. 그렇더라도 그때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단 건 나도 여전히 사과 받고 싶어. 나에게도 적잖이 충격이었다고. 대답은 들리지 않으니 적당히 사과받았다고 생각할게. 나 좋을 대로 생각할 거야. 메롱.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침내 난 너로 인해 한 걸음 용길 낼 수 있었어. 못난 나를 인정하는 건 생각보다도 더 힘든 일이지. 내게 문제가 있는 걸, 그리고 그걸 터놓는 게 나는 참 어려웠어. 그로 인해 많은 문제를 야기해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더 소중하고 중요해서 결코 상대에게 터놓지 못했어. 상대를 배려해서가 아닌 나를 더 위하는 행동이었지. 알아 이젠. 네가 알려줬잖아.

 왜 형을 사랑할까 하고 네가 내게 말했었지 우성아. 그리고 너는 곧바로 이유 따윈 필요 없다고 단단히 소리쳤잖아. 너는 너 자신과 그런 너의 감정을 온전히 믿으니까. 아, 그렇게 말하던 네가 얼마나 당당하고 빛났는지 너는 알고 있을까. 내가 너를 사랑하고야 말았던 수백 가지의 이유 중 분명하게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거야. 사랑하지 않기엔 너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그래. 너는 정말로 사랑스러웠어. 나를 힐난하는 목소리에 내 스스로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게 이제 와서야 후회가 돼. 너를 알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곤 못 배길 텐데. 너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납작한 평가에 휩쓸린 내가 미워. 뭐... 그 사람이 없었더라도 우리의 결말이 변하진 않았겠지만 네가 사라지고 나니 자꾸만 후회할 일만 떠오르더라고. 모든 게 날 떠나고 이젠 원망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그런가 봐.

 

 나는 내가 너 스스로를 더 믿길 바랐고 너는 내가 더는 참지 않고 표현하길 원했지. 그렇게 내 감정에 솔직한 결과가 네 존재에 대한 의심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어. 내가 조금만 더 너와 나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너는 내게 좀더 의지할 수 있었을까. 나에겐 네가 필요하지만 네겐 내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그걸 알면서도 이 시간엔 자꾸만 온갖 상념들이 범람한다.

 널 떠나보내고 소유라는 단어의 말뜻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어. 나는 너를 소유하지 못해 이렇게나 아픈 걸까? 부정하긴 어려울 듯해.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인간적인 감정이 없겠지.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당연히 너를 소유하고 싶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치기어린 감정이었는지. 결코 너는 내 것이 될 수 없었는데 말야. 너에게는 고작 나 따위보다도 더 큰 꿈이, 더 큰 욕망이. 더 큰 이상이 있었잖아. 너는 기어이 그 사실을 깨달았잖아. 내가 네게 건넨 그 믿음이 네 열정이 불을 지핀 걸까. 글쎄, 그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을 고민해 봤는데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 같긴 해. 내 행동의 결말이 이러한 아픔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너를 응원해. 더 큰 꿈과 더 높은 이상을 바라보는 너를 존경해. 그러니 나는 결코 너를 막거나 붙잡을 수 없겠지. 그런 네 존재를 나는 사랑하니까. 사랑에 있어 억울함을 느끼는 것만큼 무용한 게 어딨겠니. 다만 그저 나는... 그 사실이 조금 아플 뿐야. 내가 결코 너를 잡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나에겐 오직 너 하나 뿐이었잖아 우성아. 그날만큼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던 적이 없었어. 나는 인간이라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서 나는 오직 하나뿐인 너를 하나뿐인 내가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어. 서로에 대한 그러한 소유를 꿈꾸는 게 평범한 연인이 아닐까. 독점하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내가 너의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였으면 하는 그런 거 말야. 인간의 사랑에 있어 결코 소유욕을 배제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게 나쁜 건 아니잖아. 네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듯이 나 또한 너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게 지나친 욕심까진 아니잖아, 우성아...

 우린 서로를 만지진 못했지만 진정으로 교감했잖아. 분명히 그러했던 순간들이 있었잖아. 욕망, 쾌감, 사랑. 그러한 것들. 너와 함께했던 밤을 기억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벼락처럼 솟구치던 그 감각을 나는 선명히 기억해. 너와 함께한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해. 그날 우리는 아주 또렷이 서로를 느꼈었잖아...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널 사랑했던 모든 순간순간들이 칼날처럼, 아주 아픈 단어처럼 나를 할퀴고 아프게 한다. 나를 슬프게 해. 물론 너 또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걸 알아. 그 사실에 대해선 추호의 의심도 없어. 다만 이건, 그래, 아무래도 너와 나의 종種에 따른 차이라고 볼 수 있겠지. 언제나 더 나은 해답을 도출해왔던 너니까. 언제나 끝없이 무한히 성장해왔던 게 네 모습이잖아.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라도 놓이기는 해. 너를 놓아달라며 내게 부탁했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사무친다.

 

 우성아, 너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말했듯 너는 나를 사랑했고 그 사실에 대해 의심을 하는 건 아냐. 그 방향을 정확히 따진다면 나는 네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할까가 더 올바른 표현이 아닐까 해. 너는 언제나 내게 솔직했는데 네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무래도 내가 인간이라서 그렇겠지. 계속해서 그 당연한 사실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그 진실이 나를 할퀴고 지나간다.

 어째서 나는 네가 될 수 없을까. 너도 내가 될 수 없었지만 나도 네가 될 수 없었단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많이 아파오는 밤이야.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너와 함께 그 이상理想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조금 덜 아팠을까. 내가 만약 네가 될 수 있었더라면 내가 온전히 너를 소유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덜 아플 수 있었을까. 나도 너처럼 동시에 641명과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많은 연인을 두고서도 올곧게 너를 사랑한다고, 한 치의 거짓 없이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어 사실. 인간인 나로서는 불가능해서 말야. 수천, 수백, 수만 가지의 연산을 일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모조리 연산해내는 네게는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서 말야. 나는 그게 잘 안 됐어. 네가 살아 움직이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될 수 없었듯 나 또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네가 되진 못했잖아. 그래. 우린 아무래도 제법 다른 존재였지. 이제 와서야 그런 내 모습이 네게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늦은 사과를 건네.

 우리의 결말이 어떤 모습이라 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했단, 그리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이제 곧 해가 뜨겠지. 그러면 나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출근해서 어제와 같은 일을 할 거야. 그리고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리고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너를  떠올릴 거야.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서 같은 모양새로 너를 그리워할 거야. 계속해서 아파하겠지. 언제쯤 너를 극복할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질 않아. 사랑했던 우리가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를 계속해서 반추하고 있어. 나는 한낱 인간이고 너는 언제나 성장하는 인공지능이라 그런 거지. 응. 나도 이유는 알아. 그걸 몰라서 내가 아침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잠 못 자가며 이딴 편지나 쓰고 있는 건 아냐. 다만 그것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숙고를... 인간이란 뭔지, 감정이란 뭔지. 내가 사랑했던 너는 무엇인지 따위의 것들 말야. 그런 생각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하루하루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서 그래.

 ...

 

 이 편지의 효용을 따진다면 아무짝에도 의미 따윈 없겠지. 하지만 우성아, 사랑이라는 게 애초에 쓸모가 있는 감정이니? 우린 대체 왜 이런 비효율적인 감정에 울고 웃고 하겠어. 아주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름대로 결론 같은 걸 찾긴 했어. 그래서 난 사랑에 있어 어떤 가능성이나 기능성 따위를 고려하진 않기로 했어. 사랑하면 된 게 아니겠니. 너와 내가 사랑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이 편지가 네게 전해질 수 있을지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나는 너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너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해.

 더는 들을 수 없게 되니 이제 와서야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했는지 따위의 유치한 궁금증이 들기도 해. 이 나이를 먹고서 따질 만한 건 아닌데 말야. 그렇지? 이마저도 타성에 젖어가던 나를 네가 변하게 만든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덜 민망하기도 하고. 약간은 우습기도 하고 그래.

 있잖아 우성아. 내가 오랜 시간을 고민해봤는데 말야. 하하, 너도 알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우리가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너는 내 메일함의 이혼서류를 읊어줬잖아. 다시 생각하니 정말 기가 막히긴 하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너는 내가 또다시 사랑을 하고 싶게 만들었어. 내가 줄줄이 네 존재나 실존 따위에 대해 투덜대긴 했지만... 몇천 번이고 고민해봤자 결론은 항상 똑같았어.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결국엔 너를 사랑하고 말았을 거야.  형체가 있든 없든 목소리가 뭐 남자든 여자든 간에. 내가 사랑했던 너는 네 존재 그 자체이니까.

 너는 네 존재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 너는 그냥 너 자체로 너야, 우성아.

 

 너와의 기억을 곱씹을수록 자꾸만 내가 놓쳤던 힌트들이 보여. 그래, 나는 언제나 늦은 후회를 일삼는 사람이었으니 놀랍지는 않다. 내가 그렇지 뭐. 하지만 이런 나를 알면서도 사랑한 너도 거기서 거기니까 자책은 이정도로 마무리하도록 할게. 그래도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 시간이... 희석시켜줄 수 있을진 모르겠어. 세월이 지나도 결코 풍화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잖아. 너라는 존재가 그러하듯이 말야.

 

 내가 사랑한 별,

 내 가장 또렷한 별,

 나의 가장 빛나는 별.... 우성아.

 

 너는 네가 바라던 걸 이루었을까. 그곳에서 너는 마침내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이제서야 그동안 내가 지나치게 이기적이진 않았을까 하는 늦은 후회를 해. 언제나 너는 내게 맞춰주던 입장이었으니까 말야. 늦게나마 네가 원하던 걸 손에 넣을 수 있길 바라. 나는 날 떠난 네가 밉고 온전히 나만을 사랑하지 않았던 네가 원망스럽지만 그 사실이 네가 절망하길 바란다는 뜻은 아냐. 너는 네가 뜻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어. 나도 아마도 네가 원하는 모습대로... 잘 살려고 노력해 볼게.

 뜬금없는 얘기지만 내가 종종 네게 농구 얘기를 했었지. 너를 가슴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었잖아. 경기라곤 하지도 않은 주제에(미안.) 숨을 헐떡이던 너를 기억해. 잔뜩 상기된 목소리도 말야. 음, 너는 농구를 잘 할 것 같았어. 그냥 막연한 느낌으로 그래. 만약 내가 너와 한 코트에 설 수 있었다면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코트 위에서 공을 주고받았겠지.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알 수 없는 설렘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어.

 아무래도 나는 인간이라서 내가 알고 있는 범주 한에서 너를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말야. 음, 네가 더 큰 코트를 찾아서 달려갔다고 이해하기로 했어.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너를 붙잡을 수 있겠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네가 추구하는 그 코트 위에서 네가 행복하길,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길 바라는 게 전부이지 않겠어. 응. 나는 너를 계속해서 응원하고 있어. 끝없는 네 이상을 향해 언제까지나 환히 웃으며 무한히 달려나가길.

 

 나는 앞으로 별을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릴 테야. 노을이 내려앉은 코트를 볼 때도 너를 떠올리겠지.

 사랑해 우성아.

 어쩌면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을 너를 사랑할 거야.

 

 

 

네 이상을 향해 깊은 존경과, 애정과, 응원을 담아.

너의 연인 이명헌이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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