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TEXT_0015_16.png
LIST_B2.png

아버님은 농구를 싫어하신다는데 上

 

 

 

 

"그래, 정우성 선수.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

"닭발 좋아합니다."

아차차. 모렐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필레와 버터 전복구이의 반짝이는 단면을 보며 정우성은 침을 꼴깍 삼켰다. 2011 빈티지 샤또 페트뤼스 와인병에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렸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페퍼 드 선 (Sun) 창 (Chang) 양념을 입힌 피에 드 꼬끄 (pied de coq) 라는 게 있거든요?

굳게 다문 두툼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게 개빡친 끝에 상 엎기 5분 전 얼굴인지, 아님 폭소 5초 전 얼굴인지 정우성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 좋아하는 운동은?"

"예? 그거야 당연히."

세 시간 전까지 아레나에서 구르다 온 몸이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수비수 손끝에 튕겨 백보드 위로 날아오르던 샛노란 공이 지금도 아른거렸다. 깜빡. 깜빡. 테스토스테론 폭발 후 정우성의 두뇌력이란 한바탕 사냥 끝내고 돌아온 원시인 수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병아리 눈물만큼 남은 이성을 간신히 그러모았다. 지금 이 답변에 앞으로 정우성의 80년 결혼 생활이 달려 있다. 애초에 결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걸려 있다고.

농구는 절대 안 돼.

두꺼운 입술에 맞물린 와인잔 속에서 파도가 쳤다. 세월의 흔적이 세 겹 내려앉은 눈끝으로 먹물 같은 시선이 천둥처럼 굴렀다. 농구. 정우성의 인생에 농구 말고 뭐가 있냐고 한다면......

"어.... 배구?"

"배구?"

"예. 요즘 김경연 선수가 워낙 국민 슈퍼 스타지 않습니까? 저도 경기를 하나 둘 챙겨보다 보니 아무래도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하하하하.....

텅 빈 와인잔이 흑단나무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착석했다. 액체가 전혀 줄지 않은 제 잔 위로 손끝을 톡톡 굴리며 정우성은 아버님 눈치를 살폈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빗어올린 억센 머리칼. 귀 주변의 희끗한 머리칼은 일부러 내버려 둔 관록의 흔적이다. 가늘게 비상하는 정우성의 것과는 달리 두꺼운 눈썹 끄트머리는 우직하게 떨어졌다. 이 공간에 곡선이라곤 한 치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강성하게 내려오는 콧선. 와인 한 두 잔으로 축이기엔 역부족이었는지 버석한 입술은 여전히 메말랐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잔향이라도 음미하듯 내려뜬 눈길이 어딘지 익숙한데......

"정우성. 배구 좋아해?"

"예, 에? 그, 좋아하죠. 좋아하는 편이겠죠. 아마도."

"왜 좋아하지? 배구 선수가 취향이었나?"

"네? 그게 무슨 말씀."

아니, 지금 댁네 아들 달라고 하려고 앉아 있는 사람한테 무슨 질문을 하신담. 아버님도 핀트 못 잡으시고...

"배구 선수들이 키가 크니까? 아무래도 농구 선수들이랑은 환상의 짝꿍이라서?"

"엥???"

"김경연 선수가 숨겨진 이상형?"

"?????"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아몬드 모양으로 각진 눈을 홉떴다. 정우성은 멍청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위에 우성아, 방금은 이 대답이다! 하고 알려 줄 광철 씨가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안타깝게도 광철 씨의 계시는 없고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음 데시벨만 한층 높아질 뿐이다. 잠깐, 근데 여기 식당 아니었어? 제각기 대화에 열중하고 있어야 할 선량한 엑스트라들은 어디로 가고 세트장 가벽 너머로 스탠딩 조명이 번쩍거렸다. 아, 뭐야. 이거 세트장이었어? <미래 아버님과의 대화> 뭐 그런 건가?

으악! 별안간 이쪽으로 조명 감독이 둥그런 불빛을 쏘았다. 아드님을 보쌈해 가려다 오밤중에 자택에서 붙잡힌 범인 같은 자세로 정우성은 눈앞을 가렸다. 시야는 온통 새하얀 파랑(波浪)이다. 빛의 파도가 밀려드는 눈을 필사적으로 껌뻑거렸다. 번쩍이는 세상 속에서 아버님은 이제 눈꼽만큼 남은 와인을 태연자약하게 돌렸다. 뭉툭하게 뜬 저 눈 주위에 원래 주름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이게 대체 무슨 프로그램이지? 근데 내가 여기에 어떻게 왔더라.

"명, 헌이 형!"

"그러니까, 내가 안 된다고 했잖니. 뿅."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나 완전 잘 하고 있었는데!"

애초에, 진짜 아버님도 아니었잖아. 한 손에 팜플렛을 말아 쥔 카메라 감독이 이쪽을 보고 무어라 크게 소리쳤다. 바로 앞에서 하는 말인데도 물 속에서 듣는 말처럼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앞에서 아버님은, 아니 깜찍하게 아버님 분장을 했던 명헌이 형은 우아한 손짓으로 제 나비 넥타이나 손보고 있었다. 이봐요, 이명헌 씨.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프로그램 망한 것 같은데요, 지금.

뚜벅, 뚜벅.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 음향 감독의 아우성보다 더 큰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와인잔 둘이 사이좋게 놓인 테이블을 지나친 형이 내 등 뒤로 돌아갔다. 어라, 이제 보니 감독님들은 다같이 웬 유리벽 너머에 있다. 대여섯 개의 주먹이 동시에 쳐대는 통에 연약한 유리벽이 애처롭게 쿵쿵 흔들렸다. 덕택에 볼링핀처럼 툭툭 넘어간 와인잔 두 개가 피처럼 붉은 액체를 바닥으로 뚝뚝 흘린다. 아버님과의 식사에서, <아버님과의 식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촬영장으로 가더니, 이젠 좀비 영화까지?

"뭐 하니, 우성아."

띵.

청량한 소리가 정우성이 갇힌 유리 부스 안을 울렸다.

스튜디오 구석, 원래부터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엘리베이터 속에서 형이 한 손을 낭창거렸다. 피처럼 붉은 와인 웅덩이에서 그제야 떨어진 구둣발이 쩌억 소릴 냈다.

"이런 게 어딨어요, 형?"

"나라서 다행인 줄 알아. 뿅. 울 아부진 훨씬 더 무섭다."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십 년 동안 얼굴도 본 적 없다면서."

빨간 와인이 옮겨붙은 구두를 툭툭 털면서 정우성은 툴툴거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엘리베이터는 재빠르게 상승했다. 좀비 영화 세트장은 어디로 가고 우우웅, 편안한 진동음을 낸다. 초록 숲. 파란 하늘. 새하얀 해변. 알 수 없는 몇 개의 배경을 지나친 엘리베이터가 이젠 가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제법 지하철 같은 안온한 기계음 아래 화려한 도시의 청사진이 펼쳐졌다. 뉴욕과 서울을 절반씩 빼닮은 건물 숲 속에서 거대한 광고판 몇 개가 창백한 빛을 뿜었다. <더 미디어>의 인터뷰 한 장면.

저것들은 진짜 아버님이다. 이 꿈의 주인인 이명헌의 마음속에 자리한 아버님의 잔재.

"난 진짜 진지했는데. 진심이었는데."

도시가 지나가고 가로등 밝힌 공원이 나타났다. 뉘엿뉘엿 내려앉는 노을 아래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사람들의 기나긴 그림자가 빠르게 멀어졌다. 온통 네모난 도시의 스카이라인 사이로 불시에 솟은 건 빼죽 올라온 디즈니 첨탑이었다. 명헌이 형이 정우성을 달래 주기 위해 이 꿈 속에 만들어 놓은 놀이공원이다. 솔직히 이번엔 좀 심하긴 했지.

"명헌이 형, 못됐어. 남자의 순정을 가지고 놀다니."

"....... 순정... 푸흡."

"치. 순정이 왜요. 뭐?"

너무 옛날 대사 같았나? 순정은 질리지 않는 국밥 같은 단어인데. 아버님에서 완전히 명헌이 형으로 돌아온 형의 통통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게 개빡친 끝에 상 엎기 5분 전 얼굴인지 아님 폭소 5초 전 얼굴인지 정우성은 이번에도 모르겠다. 이번엔 상 엎는 얼굴이어도 안 봐 줄 거야.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화는 내가 내야지. 하나. 둘.

셋. 마음을 다잡은 지 오 초도 지나기 전에 앙다물린 지퍼 같았던 형의 눈코입이 빵 펴졌다. 톡 터지는 꽃봉오리처럼 한 순간에.

"페퍼 드 선창......... 그거, 순창 고추장? 하하하."

하하. 아하하하하. 뿅하하.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명헌이 형은 무릎까지 퍽퍽 치며 웃었다. 그게 그렇게 웃겼나? 저 무뚝뚝한 눈꼬리를 초생달 모양으로 접고, 쇳소리까지 섞어 대차게 웃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정우성에겐 "뿅하하" 쪽이 더 웃긴 것 같은데. 놀이공원으로 내려앉는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슬그머니 왼쪽 가슴께를 말아쥐었다. 이 장난꾸러기 설계자를 만난 지가 벌써 몇 년 째인데. 옮겨붙은 와인 자국이 간지럽히는 것마냥 심장 한 구석이 어수선했다.

아버님은 농구를 싫어하신다는데

일단 배구도 기각인 듯함

"또 망했어, 광철. 명헌이 형은 내가 아버님 만나는 게 싫대요."

"어이구. 보통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닌가 보구나."

광철 씨가 말끝을 흐렸다. 정광철 씨와 그의 아들 정우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스포츠 스타는?> 랭킹에 빠지지 않고 매해 1위로 이름을 올릴 만큼 돈독한 사이였다. 그러니까 생부와 십 년 넘게 말도 섞어본 적 없다는 명헌이 형의 케이스를 해결하기엔 광철 씨도 정우성만큼이나 답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자꾸 아버님 만나고 싶다고 조르니까 이번엔 글쎄 꿈 속에서 자기가 아버님으로 변장을 하고 나온 거에요. 아니지, 변장이 아니라 변신인가? 그러고선 나랑 같이 와인 한 잔 마셨는데, 갑자기 나한테 불합격이래. 자기는 무슨 내 말에 빵 터져 놓고."

"아무 말? 무슨 말 했는데?"

"꿈에서 명헌이 형이 무슨 음식 좋아하냐고 묻길래, 닭발 좋아한다고 했거든요. 피에 드 꼬끄 순창."

"그거 정말 하나도 안 웃기구나."

"그렇죠?"

그나저나, 이 서방 꿈 사업은 잘 되어가냐? 영상 통화와 모니터 사이를 시선으로 왔다갔다 하며 광철 씨가 물었다. 광철 씨 목소리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어서 정우성은 기운이 좀 빠졌다. 솔직히 약간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1g , 아니 9.4g 정도?

"형 꿈 사업이야 뭐, 내 경기 성적만 잘 나오면 되죠."

"그거야 그렇지. 내일은 솔트 레이크 시티로 가냐, 우성아?"

"맞아요. 건조한 거 싫은데."

그런 말 마라. 여긴 어제 온도 30에 습도가 80을 돌파했어. 한국 발 디디면 너 곧바로 그 말 한 거 후회할 거다. 광철 씨의 날씨 투정을 건너 들으며 모니터에 뜬 훈련 일정을 눈으로 좇았다. 흔치 않게 주어지는 삼 일의 공백. 이동과 휴식, 트레이닝 사이에 <드림 트레이닝> 일정이 들어가 있었다.

드림 트레이닝.

여러 사람이 하나의 꿈을 공유하는 기술이 나온 순간부터 다양한 훈련과 꿈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시간이 십 분의 일의 속도로 간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꿈에는 많은 강점이 있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죽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고통만은 선명하게 느끼기에 ㅡ 꿈 속에서 인체에 자극과 부하를 가하는 것만으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혁명이었다.

가장 먼저 드림 트레이닝이 시작된 분야는 군사 부문이었으나 그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드림 트레이닝이 사라진 게 아니라 해당 훈련의 유효성을 깨달은 국가들이 트레이닝 방식을 제각기 기밀로 유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현재 드림 트레이닝은 차츰 고착화되던 스포츠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스포츠의 정수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드림 트레이닝도 만능은 아니었다. 꿈 속에서는 백발백중으로 자유투를 성공시키던 선수가 실제 경기에서는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꿈 속 훈련에만 몰두한 선수가 실제 훈련을 게을리한 결과 피지컬이 하락하는 사례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트레이닝이 잘 맞는 선수에게 해당 훈련은 페라리 차체에 롤스로이스 엔진을 다는 격이었고, 따라서 꿈 속 트레이닝의 설계자는 물론 트레이닝이 잘 맞는 선수 역시 구단 입장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게 되는 자원이었다.

"정우성 선수. 드림 트레이닝은 중학생 때 한 번 접해본 게 전부... 평소에 자각몽도 안 꾸고."

"그런데요."

이명헌을 처음 만났을 당시에 정우성은 슬럼프였다. 이명헌은 어딘가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꿈의 설계자였고 말이다. 중력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꿈 속에서 농구 훈련을 한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고작 그런 훈련에 의존하는 선수들에게 밀려 제 드래프트 예상 순위가 2라운드로 밀려났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포츠란 모름지기 가장 격렬하게 현실에 맞닿아 있는 분야 아니던가. 그런 발상의 한 구석에는 한때 농구 천재로 추앙받던 스스로가 드림 트레이닝의 적합자가 아니라는 데 대한 억울함이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꿈 공유도 해 본 적 없겠네."

"맞는데요."

흠. 맞은편에서 차트를 훑던 물고기 같은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꿈을 다루는 남자여서 그런가. 정우성은 그가 꿈에서 막 걸어나온 사람 같다고 느꼈다. 점토를 뚝뚝 떼어 만든 것처럼 투박한 인상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늘 먹먹하고 흐릿한 꿈 속 세계처럼 몽롱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두꺼운 콧대와 돌처럼 딱딱한 턱선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랬다. 차트를 넘기는 손가락 끝에는 두둑한 굳은살이 알알이 박혀 있었는데 공을 다루는 통에 박혀 버린 정우성 손가락의 굳은살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수비를 찢는 칼날이 아니라 물감을 짓뭉개는 나이프 같았다고 할까. 연약한 세계를 주무르는 화가의 손끝에는 오히려 더 많은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차트 위의 정우성을 형상화해 놓은 글자들이 남자의 몽롱한 바다와 이리저리 뒤섞일 때마다 정우성의 머릿속에서는 질문이 휘몰아쳤다. 당신이 그리는 꿈에는 나를 위한 자리가 있을지 알고 싶다. 누구의 꿈에도 쉬이 들어맞지 않는 내가 당신이 설계한 세상이 찾던 퍼즐 조각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꿈에 들어가도록 허락된 것은 나 이외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탁.

차트가 접혔다.

"누워, 정우성."

꿀꺽.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정우성이 옆에 마련된 의료용 의자 위에 얌전히 드러누운 건 결코 쫄아서는 아니었다. 먼저 싸가지 없게 군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도 아니고. 내 팔의 소매를 걷어 속살을 드러내는 남자의 손길이 건축가가 아니라 숙련된 간호사의 것처럼 부드러웠다. 드림 머신의 차가운 패치가 피부에 붙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일어선 것이 팔뚝의 소름만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만.

"저, 기요."

걷어붙인 남자의 옷소매 사이로 드림 머신과 연결된 선줄 하나가 보였다. 자기 팔엔 언제 붙였담.

아아아.....

보통 남자 손길이 이렇게 부드럽나?

아아아아.........

절대 여자 같은 느낌은 아닌데. 딱딱한데, 꼭 물로 찰박거리는 것처럼.

아아아아아..............

(같은 팀 동료 제이슨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을 떠올린 정우성은 헛구역질을 참았다.)

첫 만남에서 팔뚝 좀 만졌다고 거기가 서 버린 걸 들켰으면 어쩌지. 그냥 거기가 너무 추웠다고 해야겠다. 아니 그러니까 거기 말고, 그 장소가. 물론 거기가 추워진 것도 맞지만, 이 남자 덕분에. "거기" 라는 단어가 게슈탈트 붕괴를 일으킨다. 거기. 고기. 그기.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온통 어둡다. 방금 전까지 분명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 같

"으아아아아아!!"

그 비명이 제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는 걸 정우성은 뒤늦게 깨달았다.

뒤로 넘어갔던 몸이 이번엔 앞으로 휙 쏠렸다. 철컹철컹철컹. 정우성은 롤러 코스터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터널을 빠져 나와 360도를 돌기 직전의 롤러 코스터 말이다. 여기가 어디지? 생각해 보니까 이곳은 오하이오의 시더 포인트 (Cedar Point) 였다. 시더 포인트로 말할 것 같으면 있는 놀이기구라고는 롤러 코스터 18개밖에 없는, 소싯적에 <롤러 코스터 타이쿤> 에서 온갖 괴물 머신 좀 만들었다는 꿈나무들이 모인 정신 나간 롤러 코스터의 성지다.

"아아아아아악!!"

정우성은 비명을 질렀다. 거꾸로 설 머리카락도 없는데 애처롭게 뒤집어진 시야가 덜커덕 덜커덕 흔들렸다. 우측으로 홱 돌아간 열차 덕에 절로 옆쪽으로 시선이 갔다. 이제 보니 곁에는 태연한 무표정을 한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 이 남자, 알고 있는데. 이름이 뭐더라?

"이, 명헌 씨."

"........"

"이명헌이 (Honey) !!!"

"그렇게 애타게 안 불러도 되는데. 뿅."

이명헌 씨는 아무래도 놀이기구 탑승 분야의 보통 고수가 아닌 모양이었다. 360도를 두 번 돌고 좌우로 트위스트 후 75도쯤 되는 각도로 추락 중인 롤러 코스터 안에서도 심드렁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걸 보면 분명 그랬다.

"......... 그렇게 ...... 없어?"

"네?"

뭐라는 거에요? 안 들려요. 대환장 파티는 도통 멈추지를 않았다. 그렇게 많은 레일이 다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릴 때 롤러 코스터 타이쿤 게임 속 관광객들에게 무자비한 탑승 경험을 선사해서 토하도록 만드는 걸 내심 즐겼던 정우성은 속으로 통한의 반성문을 읊었다.

"너 ....... .......... 가 없냐고?"

흔들흔들 흔들리는 트위스트, 그 속에서 옆좌석 남자의 입모양에 간신히 집중했다. 뭐가 없냐는 거지? 격렬하게 넘실거리는 화면과 사운드 속에서도 이 남자의 태도는 무섭도록 차분했다. 덕분에 정우성은 남자가 하려던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

원래......

그렇게.........

너 원래 그렇게 말투에 싸가지가 없어?

조막만한 탄광 열차가 가파른 곡선을 한 번 훌떡 넘어섰다. 레일이 뚝 끊어진 틈을 지나 공중으로 솟구친 사각형이 곧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형!!!"

추락하는 탄광 열차 롤러 코스터 속에서 정우성은 소리를 질렀다. 어쨌거나 곁의 남자가 태연한 걸 보니 이대로 죽는 건 아니지 않을까? 이거 다 서프라이즈 맞죠? 하하하하.

흔들다리 효과 (Suspension Bridge effect) 에 따르면, 위기 상황을 함께한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날 정우성이 겪은 상황은 호감을 느끼지 않기에는 너무 큰 위기였다.

("위기 겪기 전부터 세웠잖아. 뿅." 가차 없는 손속의 꿈 설계자가 핀잔을 주었다.)

"명헌이 형이 뭐래도 전 꼭 결혼식에 아버님 초대할 거에요."

"명헌이가 싫대지? 본인이 필요 없다는데 왜 그래."

포차 구석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새빨간 피에 드 꼬끄 드 순창, 아니 순창 고추장에 버무린 닭발 두 쪽이 낡은 전구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두요. 나는 광철 씨랑 미사 씨 둘 다 올 건데 명헌이 형 쪽은 아무도 안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뻔히 계신 아버님 초대를 안 하기도 좀. 흐아. 나 유교 보이였나 봐요. 형 결혼 소식이 아버님 귀에 안 들어갈 사람도 아니라 더 그래."

"아버님이 워낙 유명하시긴 하지."

"아버님만 그런 게 아니라, 명헌이 형도 유명한데."

얼씨구. 애인이라고 띄우냐, 지금? 현철이 형이 투박한 제 손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소주잔을 이쪽 잔 끝에 팅 부딪혔다. 그야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의 삼 분지 일은 손에 쥐고 계신 아버님에 비하면 명헌이 형의 명성은 소박한 편이기는 하다.

"애초에, 둘이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진 거지. 명헌이 형 말하는 거 보면 싸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형 어렸을 때 아버님이 아이돌이라도 하라고 했나?"

"정우성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유어 마이 소다 팝. 마이 리를 소다 팝.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틀어놓은 라디오에 맞춰 심심한 박자를 타던 현철이 형이 마지막 닭발 한 조각과 함께 소주잔을 털어 넣었다. 양념만 남은 접시와 메뉴판을 번갈아 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제 어깨로 손을 두른다.

"술은 이제 그만 마셔라, 우성아. 시즌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간만에 원온원이나 할 텨?"

"원온원은 됐구요. 걷기나 좀 하다 들어가요."

"네 입에서 원온원이 싫다는 말이 다 나오는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꿈에서 하도 했더니. 명헌이 형이 미국 선수들한테 밀리면 안 된다고 죄다 현철이 형처럼 투박한 상대만 만들어 놓는다니까요."

소주잔 대신 계산서를 집어든 현철이 형이 목을 우두둑 꺾었다. 근데 지금 나 근육 빠질까봐 배려해 주는 거냐, 정우성?

STAR.png
00:00 / 04:20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