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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경중원(破鏡重圓)

 

[본 연성은 영화 ‘전우치’(2009년)에서 영감을 받아 각종 배경 및 설정을 차용하여 쓴 정우성x이명헌의 CP연성입니다.

특히 초반 세계관 나레이션 및 일부 장면 구성에 원작을 차용하였습니다. 글쓴이는 원작을 훼손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존중함을 밝힙니다. 독자분들께서 연성을 보기 전 영화를 시청해 주신다면 배경 이해에 수월하며 더욱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합작 열어주신 주최님께도 무척 감사드립니다. -자판기-]

 

1. 어긋난 존재

 

아주 먼 옛날, 태초에 땅에서는 인간과 짐승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세상의 평화를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열 두 마리의 짐승을 닮은 성정 포악한 요괴들이 삼계를 구분하지 않고 날뛰며 혼란을 일으켰다. 위험에 처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신선들이 나섰고, 요괴들은 하늘 깊숙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선들도 그들을 봉인하였을 뿐 얌전하게 만들지 못하였다. 하여 마지막 방도로 도력 높은 대 신선, 채소연에게 요괴들의 야성을 잠재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 신선 소연은 신비한 피리를 삼천일 동안 불며 요괴의 마성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러나 미관말직 신선 셋의 실수로 마지막 날 열렸어야 될 감옥 문이 하루 먼저 열리고 말았다. 그 즉시 요괴들의 마성은 다시 깨어났고 피리는 사악한 기운에 잠식당했다. 자아를 찾은 요괴들은 모두 피리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피리를 빼앗긴 소연 신선은 요괴의 마성에 젖은 채 지상으로 떨어졌고, 지상으로 쫓겨와 인간의 몸속으로 숨은 요괴들과 함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후에 사람들 사이에선 오직 피리를 가진 자만이 요괴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

.

.

“이런다고 잡을 수 있는 거예요? 벌써 며칠째인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요.”

“인간 속에 숨어든 요괴는 그냥 보면 구분하기 힘드니까 뿅….”

“불만이면 네가 다른 대책을 내놨어야지.”

“아니-, 애초에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안 따라오고 계속 수련이나 했을 거예요.”

“너무 투덜대지 마라 뿅. 요괴도 너처럼 좀이 쑤셔서 곧 나올 거다 뿅.”

달빛만이 길잡이가 되어줄 고요한 밤, 세 명이 나란히 서서 으슥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를 박박 밀고 펄럭이는 흰색 도포를 입은 남자들이었는데, 키와 덩치가 웬만한 담장은 거뜬히 넘을 정도로 커다랬다. 셋 중에서 가장 작은 빡빡이의 말처럼 정말로 가만히 있기가 힘든지, 좀 전에 투덜댄 잘생긴 남자가 몸이라도 풀 요량으로 팔을 하늘로 뻗고 몸을 늘였다. 잠도 부족한듯 하품도 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가자 뿅.”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남자 셋이 달렸다. 그런데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것이, 한 걸음 뗐을 뿐인데 저만치 떨어지고 두 발을 뗐을 땐 이미 커다란 덩치가 남들처럼 보일 만큼 멀어졌다. 그리고 세 발을 뗐을 땐 이미 점처럼 작아져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땅을 접어 달리나 싶을 만큼 눈 깜짝할 새에 이동한 사내들은 곧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살려주세요!”

집은 산 초입에 있었다. 동물을 키우는지 멀지 않은 곳에 축사가 있었는데 그곳이 비명의 근원지였다. 서둘러 가보니 주변엔 이미 죽은 동물 사체가 몇 널려 있었고, 눈을 번뜩이는 노인과 상처를 입고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가 대치 중이었다.

“…강도?”

“네 눈은 장식이냐? 저게 사람으로 보이게?”

노인은 입 주변과 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였다. 바닥에 있던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세 사람을 보고 저를 도와주러 온 원군인지 새로운 적의 등장인지 몰라 긴장하여 눈만 굴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상황임에도 동요하지 않은 듯, 가장 작은 남자는 고요한 눈으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상황파악을 끝냈다. 이런 와중에 수업이라도 하듯이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연다.

“최근 생긴 사건들 특징 첫 번째 뿅. 밤에 일어났다 뿅.”

“오….”

“두 번째는 주로 동물을 노렸다 뿅. 식사에 가까운 형태 뿅.”

“꼭 짐승이 사냥한 것처럼 그랬다더라.”

“마지막으로 발견한 사람은 상해를 입기도 했는데, 도망치던 중 할퀸 자국에 가까웠뿅.”

종합해보자니 이랬다. 야행성에 육식하는 짐승이며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다. 열 두 마리의 요괴 중 그런 특성을 가진 존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많이 쳐줘야 용이나 개, 호랑이일 텐데…. 이명헌이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줄곧 투덜대던 정우성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저 사람이 요괴인지 확신할 수는 없잖아요. 때가 안 맞아서 우리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고요.”

옆에서 현철이 한숨을 쉬었다. 정우성 넌 너무 물러서 문제야. 작은 타박에도 뜻을 굽힐 생각은 없는지 우성은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명헌은 피곤한 듯 제 목덜미를 주무르면서도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요괴들은 얼마든지 인간 속에 숨을 수 있다 뿅. 그건 단순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다 뿅.”

본보기를 보여주려는지 명헌이 바닥에 널린 볏짚을 한 움큼 주워든다. 대치 중인 자가 행동을 시작하자 피 칠갑한 노인의 시선이 바닥에 있던 사내에서 명헌으로 바뀌었다. 쉭! 손에 쥔 볏짚을 가로로 넓게 던지니 그것들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침으로 변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노인이 웬만한 청년보다 빠르게 뒤돌기를 하며 물러났다. 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속도와 행동이었다.

“정말 속에 숨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 뿅. 거죽을 뒤집어쓴다는 말을 알아 뿅?”

이쯤 되니 제 정체를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노인은 사람의 목소리라 할 수 없을 소리를 내며 크게 울부짖었다. 더해서 옷을 벗듯이 스스로를 찢어발기자 본 모습이 드러났다. 구름이 걷히고 숭숭 구멍 뚫린 축사 지붕을 통해 달빛이 내려앉는다. 밝아진 덕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변화한 노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솟은 귀가 동그랗고 조그맣다. 덩치는 크고 얼룩무늬가 있으며 육식을 즐긴다. 밤인데도 눈이 번뜩이는 것이 어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야행성….

“와, 씨. 호랑이잖아! 우리 셋으로 되는 거예요?”

“셋이라 그나마 다행이지. 거 봐라, 너 안 왔으면 우리 어쩔 뻔했냐.”

다들 태세를 단단히 준비하면서도 말하는 내용은 제법 여유로웠다. 범상치 않은 인간들의 등장에 호랑이 요괴가 긴장한 듯 몸을 낮추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먼저 노릴 사냥감을 탐색하듯 그르렁거린다. 잠깐의 숨 막히는 대치 후 호랑이가 먼저 향한 상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현철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민간인의 앞에 섰다. 쿵! 흡사 소 두 마리가 부딪히는 것처럼 육중한 소리가 크게 울리고, 그 뒤를 이어 우성이 재빠르게 요괴에게 달려들었다.

허리춤에 달랑거리던 손바닥만 한 단검이 우성의 손에 닿자 장검으로 변화한다. 크기의 변화와 동시에 발검하는 순간 날카로운 검신이 드러났다. 곁에 있을 현철을 고려해 세로로 내리긋자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곧이어 듣기 싫은 끼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내 검이랑 맞붙을 생각을 해?”

요괴의 발톱과 검이 맞물렸다. 힘겨루기하느라 조금씩 밀고 밀리기를 반복하는동안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마주쳤다. 그사이에 현철과 명헌은 널브러진 남자를 부축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실력과 말투…를 보아하니 산왕이십니까?”

“뿅.”

“다친 곳은 없습니까?”

“예, 예…. 팔을 긁힌 정도입니다. 축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확인하러 갔다가 마주치게 된 거라서요. 그런데 저….”

 

구출된 남자는 머뭇거리듯 입술을 짓씹다가 민가가 가까워지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저희 아버지가 요괴인 겁니까…?”

흐흑.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닌 것을 깨달은 남자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동하며 서신을 적던 명헌이 그런 남자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거두었다. 사용이 끝난 붓을 품에 넣어두고 작은 종이를 몇 번 접어 쓰다듬자 서신이 곧 하얀 새로 변해 날아갔다. 요술 같은 상황에 남자가 놀라 잠시 울음을 그치자 명헌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요괴인 게 아니라…. 몸을 빼앗긴 거 뿅.”

“명헌아. 말을 좀.”

“처음부터 저러진 않았겠지 뿅. 최근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 뿅?”

다시 나온 아버지 이야기에 남자는 눈물을 참으며 지난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힘들어서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투덜대던 아버지가 갑자기 회춘한 것처럼 물건들을 번쩍번쩍 든 일이나, 이가 안 좋아 물에 만 밥만 드시더니 최근엔 고기를 먹어야겠다고 했던 일 같은 것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런 순간에 의아함이 들기는 했으나 아직은 더 살려는 마음이 있으신가보다-하고 애써 상황을 모른척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미웠다. 그래도 최대한 도움이 되고자 생각나는 것들을 두서없이 말하였더니 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이상했습니까? 정확한 시기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 전에 한 번 밤이 늦었는데 방에 계시지 않은 적이 있으셨는데…. 다음날 상태가 아주 안 좋으셨어요. 말씀도 한번 없으시고 늘 돌보던 동물들도 보러 가지 않으시고…. 그게 한 달쯤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뒀지 뿅.”

“연세가 많으셔서 원래도 잠이 많이 없으셨습니다. 그날도 그저 잠이 안 오시는가보다, 소들을 보고 오시려나 보다 하고 말았지요. 계속 안 계셨다면 찾으러 다녔겠지만, 상태가 이상하긴 했어도 다음 날에는 집에 계셨으니까요.”

최근 마을에 돈 소문이 시작된 시기와 대충 비슷했다. 구미호가 있는 것 같다느니 귀신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은 처음엔 헛소리 취급을 당했다. 마을에 누구 하나가 앙심을 품고 남들을 괴롭히는 것 같다는 게 이장이나 관리의 주 의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주기가 잦아지자 결국 사람들이 산속에서 수련하던 산왕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산왕이 고충을 듣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마을에 셋을 보낸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그동안 정보를 취합하고 특징들을 선별한 뒤 밤을 새우며 순찰하던 것은 오늘부로 나흘째였다.

셋은 계획을 세운 후로 기운을 숨기지 않고 다녔다. 다른 사람에게 위압을 주지 않을 정도라면 가감없이 드러냈다. 사람도 단 하루만 굶어도 배가 고파 난리인데, 짐승은 오죽할까. 하지만 실력자들의 기운을 느꼈을 테니 전처럼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명헌은 일부러 순찰 구역을 천천히 넓혀 나갔다. 도망간다면 잘 된 일이겠지만 먹을 것이 풍족한 이곳을 쉽게 떠나진 않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마침내 이 상황이 찾아왔다.

사냥은 너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지 뿅. 꾸준히 숨통을 조이는 건 내 특기라 뿅.

명헌과 현철이 남자의 말을 듣고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쫓던 녀석이 아까 그 놈이 확실하네. 서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아무리 변두리라 한들 한밤중에 쿵쾅대며 요란하게 군 탓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깨고 있었다. 일찌감치 불이 켜진 의원의 집에 다친 이를 내려주고 명헌과 현철은 바삐 움직였다. 처음 소란을 알아챘을 때처럼 땅을 접어 달려 사라지자 그걸 본 마을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볐다. 정말로 도사구나! 누군가의 감탄 섞인 외침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남자를 구출하고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는 동안 우성은 여전히 호랑이 요괴와 대치 중이었다. 캉! 캉! 소리를 내며 손톱과 검이 부딪히고, 요괴에게 얕은 상처를 입히기도 했으나 타고난 힘의 차이 때문에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아, 답답해! 마음 같아서는 큰불을 일으키거나 바람을 강하게 다스려 저놈을 멀리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민가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다간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겠지. 후. 낮게 숨을 고르며 제 마음을 다스려 보려고 했지만, 요괴가 자꾸만 제 성질을 건드리듯 짧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이거 좀 위험한데. 그도 그럴게….

“정우성!”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우성이 휙 고개를 돌렸다. 현철이 형! 순간 안심이 된 탓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는데, 그 때문에 한순간 무방비해진 것이다. 얀마! 적을 앞에 두고 집중력 흐트러지는 놈이 어디 있어! 득달같이 날아오는 불호령에 우성이 아차 싶어 다시 시선을 옮겼지만 이미 제 검은 작은 형체로 돌아온 뒤였다. 순식간에 소란해진 전장에서 호랑이 요괴는 덤벼드는 대신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는 이따 관절꺾기 당할 줄 알아! 형이 먼저 저 불렀잖아요! 두 사람은 투덕대면서도 서둘러 요괴를 쫓기 시작했다. 이명헌은 등에 멘 활을 꺼내 들며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시선으로 쫓았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화살을 건 뒤 시위가 팽팽해질 정도로 당겼다. 탁! 소리와 동시에 쉭-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순식간에 요괴에게 다다른다. 호랑이는 가소롭다는 듯 한 번 뛰어 자리를 벗어났는데, 기이하게도 화살은 땅에 꽂히지 않고 그대로 방향을 틀어 요괴를 다시금 쫓았다. 화살 깃이 안내 등처럼 번쩍거리며 빛을 내뿜는 것을 확인한 셋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아무리 산에 살며 날고 기는 인간들이라 해도, 한밤중에 숲에 숨은 호랑이를 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셋 중에서 가장 먼저 화살에 다다른 이는 우성이었다. 그러나 요괴가 따돌리기라도 했는지 화살은 나뭇가지 사이에 껴 방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아, 젠장….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가늠하는데 다른 쪽에서 또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어우, 죽는 줄 알았네.”

큰 소리는 현철과 호랑이가 낸 소리였다. 초반에 화살을 쫓던 현철은 중간부터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느끼고 다른 길로 향하던 중이었다.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계속해서 진동한 탓이었다. 처음엔 안 나던 것이 갑자기 난다면 바람이 부는 쪽에 있다는 거겠지. 거기까지 계산을 마치고선 요괴를 뒤쫓았고, 거의 다다랐는데 순간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기습에 대비해 속도를 줄이려는 찰나 풀숲에서 요괴가 튀어나와 현철을 노렸다. 아무래도 모든 장애물을 피할 수 없어서 몇 개는 부수거나 부딪히며 왔더니 그 소리를 듣고 제 위치를 파악한 듯했다. 다행인 건 이상함을 느낀 현철이 속도를 줄이려는 와중에도 방심하지 않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긁히긴 했지만 급소를 피해 중상은 면했다. 곧장 뒤쫓을 요량이었으나 요괴는 어둠을 장막으로 삼아 사라진 뒤였다.

 

쉬익! 정신없이 도망치던 요괴에게 무언가 날아든다. 급하게 피해 보려 했지만 이미 우성과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데다 조금 전엔 현철과 부딪힌 탓에 한 박자 늦고 말았다. 처음 눈에 담은 건 가죽 끈이었는데 제 몸에 달라붙었을 땐 쇠로 된 사슬로 변해 있었다. 사슬이 요괴의 발목부터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온몸을 칭칭 감는다. 쿵. 요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넘어지고, 족쇄를 끊어보려 바둥거렸지만 그럴수록 더 강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스슥, 발걸음 소리가 아닌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명헌이 요괴의 앞에 섰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나도 내려다보는 걸 꽤 좋아해서 뿅. 기척도 잘 알아채는 편이고 뿅.”

마침내 조우한 곳은 산꼭대기 근처였다. 놀랍지도 않다는 듯 명헌은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며 대답했다. 쓰러진 요괴를 내려다보며 주문을 읊자 발끝부터 아지랑이처럼 변하더니 호리병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어엉!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듯 사납게 포효하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호랑이가 이내 원망스러운 눈으로 명헌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것!”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뿅….”

“분명 두고두고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러니까 네가 용보다도 못한 거야.”

킥킥 비웃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빨려 들어가자 명헌은 마개를 닫았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지 뿅?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풀과 나무를 헤치고 현철과 우성이 등장했다. 손에 든 호리병과 바닥에 널브러진 가죽끈을 보고서 우성이 환하게 웃었다.

“잡았어요?”

“뿅. 그런데 방금… 요괴가 하는 말 들었뿅?”

“…울음소리는 듣긴 했는데.”

“인간 모습도 아닌데 말을 할 수 있어요?”

구조적으로 되나? 우성이 궁금한지 흉내를 내보려는 듯 호랑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야, 그게 되겠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현철이 나무라자 우성이 억울한 듯 명헌을 바라봤다. 명헌이 형이 들었느냐잖아요! 사람 탈 안 쓴 요괴가 말을 어떻게 해, 인마! 투닥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명헌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걸 말을 했다고 잠시 착각한 거 같뿅. 호랑이가 말을 하긴 어렵지 뿅….”

명헌이 순순히 인정하자 우성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죠. 형은 남의 마음 읽는 걸 잘 하는 편이니까. 그렇게 사소한  논쟁도 끝났겠다, 일이 마무리되니 피곤이 몰려오는지 현철이 목을 좌우로 꺾고 어깨를 돌려 몸을 풀었다.

“그럼 오랜만에 밤에 잠 좀 자자. 요새 순찰한다고 꼬박 밤을 새웠으니…. 너도 그래서 착각한 거야.”

“이장한테 간단히 설명하고 가자 뿅. 본산에는 천천히 돌아가도 되니까 뿅.”

명헌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현철과 우성이 뒤로 따라붙었다. 신이 난 목소리도 함께였다.

“우와! 그럼 우리 시내 구경하고 가도 돼요?”

우성이 명헌의 옆에 바짝 붙어 선다. 잠시 고민하던 명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앞장서는 강아지처럼 우성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길 잃는다. 현철의 말에 우성은 보란듯이 뒤까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산에 산 지가 벌써 10년째인데 길을 잃으면 그것도 재주죠. 이렇게 뒤 돌아 걸어도 아-무 문제없거든요.”

“저, 저. 그러다 코가 깨지는 수가 있어.”

“뒤로 넘어지는데 코가 어떻게 깨져요?”

“넘어져서 깨진다고 안 했는데.”

그 말과 함께 현철이 주먹을 쥐니 우성이 한번 팔짝 뛰었다가 얌전히 명헌의 옆에 섰다. 시끄럽던 분위기는 현철의 경고로 잠시 조용해졌다. 가는 길에 풀벌레 소리와 작은 돌이 부스러지는 소리만이 울린다. 그러나 아까 들었던 말이 신경 쓰여 명헌의 속은 소란하기만 했다.

“시내 가면 분명 재밌을 거예요. 형은 뭐 하고 싶어요?”

그새를 못 참고 묻는 말에 명헌이 우성을 올려다본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우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챈 명헌이 이유를 묻는 듯 한쪽 눈썹을 들었으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건 오히려 우성이었다.

“형 지금 눈이… 아니, 잘못 봤나 봐요.”

“눈이 왜 뿅.”

“아니에요. 잘못 본 것 같아요.”

“싱거운 녀석. …너 혹시 이상한 말 하려고 했던 거 아니냐? 눈에 별이 든 것 같아요~이러면서?”

“뭐예요? 참기름 한 열 숟갈 먹은 것 같은 말은? 현철이 형 그런 취향이에요?”

“이 자식이.”

순식간에 다시 소란스러워졌지만, 명헌은 속은 아까와는 반대로 고요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른다. 어떤 감각이 발끝부터 저를 옥죄는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어긋나는 감각. 그러나 그것의 원인을 명헌은 알지 못하여 불편할 뿐이었다. 현철이 우성의 목에 팔을 감고 잔뜩 죄며 응징하는 것에 잠시 시선을 둔 명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평소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서 상황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오늘까지 날밤 새우기 전에 얼른 돌아가자 뿅.”

명헌의 지시에 현철이 우성을 놓아주었고, 우성도 납득한 듯 다시 말수가 줄었다. 처음처럼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도 순식간에 내려온 세 사람은 마을 이장과 관리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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