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PROSE on the COURT
사와키타 에이지 × 후카츠 카즈나리 영화 합작 < 94万キロのフィルム>
Movie AU: <The Proposal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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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인 두사람의 국적은 일본이나 해당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영어로 소통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미국 이민 또는 미국 비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아님으로 맥락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충격! NBA 신성 사와키타 에이지 선수, 열애 인정과 동시에 결혼식 올린다 공식 발표...]
...(중략)... 이번 달, 사와키타 선수의 경기 직후 코트 인터뷰 중 " 여러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으면서까지,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할 것이 있다. 아주 소중한 인연이 생겼다." 발표했습니다. 상대방은 일반인이자 사와키타 에이지의 개인 코치이자 매니저로 알려진 'K'씨로 알려져 화제입니다. 인터뷰 내용을 빌리자면 "연인 사이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간 좋은 사람임을 확신하여 급하게 날을 잡았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사와키타 에이지 선수는 결혼식을 위해 양가 측의 허락을 맡고 있으니 예쁘게 봐달라는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후략)...
이.......개씨발새끼가..............
후카츠는 생전 입에서 내뱉어 본 적이 없는 천박한 단어를 내뱉으며 보고 있던 태블릿을 소파에 던졌다. 고백 공격이라고는 고등학교 이후에 당해본 적도 그리고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자신에게 프러포즈 공격을 해온 상대가 본인 직장의 상사일 때,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한 번도 배워 본적이 없다. 후카츠가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은 자신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이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태생부터 가족에게 얽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본인이었기에 별다른 생각도 없었다. 너무 어릴 적부터 고향인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해 왔던 탓에 오히려 아주 긴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생각할 지경이었으니까. 머리가 크면서 자신이 가진 미국 시민권이 아주 귀한 것임을 알게 되어 자신의 의사와는 필요 없는 강제적인 이민을 선택한 조부와 부모에게 약간의 감사함을 느꼈다. 아주 콩알만큼이지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그나마 콩알만큼이라도 있었던 '감사'라는 감정에 빨간 줄을 좍좍 긋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시민증을 불태우고 싶었다.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태블릿을 던진 후 소파에 기대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틈사이로 깊은 한숨을 쉬고 있는 후카츠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덮였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겠네요?"
"닥쳐주세요... 미친새끼야..."
커다란 그림자의 정체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사와키타 에이지 선수였다. 후카츠의 직장 상사이자, 케어 대상, 그리고 취직 이후에 생긴 모든 스트레스의 원흉. 푸른색을 띠고 있는 눈 밑의 다크써클과 지끈거리는 편두통이 말해주고 있다. 퇴사가 답이라고. 이 미친 자식에게서 탈출해야 한다고. 애초에 에이전시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때 소개랍시고 대뜸 비싼 일식 레스토랑에 끌려간 것부터가 문제였다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를 고민하던 후카츠의 손이 대뜸 사와키타의 손에 들려졌다. 사와키타는 들려진 손을 그대로 후카츠 본인의 눈앞에 올려두더니 말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경기 다 끝났으니까 스케줄 프리죠? 그럼, 바로 후카츠상 부모님께 인사하러 가야겠네요~"
눈앞에 보인 손에는 못 보던 반짝거리는 뭔가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있었다. 얼마 전, 친한 지인이 웨딩 예물이라며 보여줬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세 개 색상의 얇은 테가 반짝거리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감싼 형태의 반지였다. 마치 자신을 봐달라는 것처럼 중앙에 위치한 다이아몬드의 컷이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너무 정교했고 크기는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분명 지인의 웨딩밴드는 이 정도까지 번쩍거리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아 보였는데.
"......이게뭡니까."
"프러포즈 링이요. 이 정도는 해야지 다들 속아주는 듯해서요."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봅니까? 왜 본인 마음대ㄹ..."
"급박하게 구하느라고 조금 싼 걸로 했어요~! 후카츠상네 부모님 뵙고 웨딩 준비할 때쯤에는 같이 사는 걸로 해요.“
말을 끊으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와키타에 후카츠는 쌍욕을 뱉으며 그대로 반지를 빼 면전에 던질 뻔했다. 하나부터 열가지 맞는 게 없는 개자식에게 프러포즈 공격을 당하다니. 후카츠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평탄치 않은 모든 인생 굴곡에서 제일 기가 막히고 굴곡진 아주 엿같은 곡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번쩍거리는 이 반지 말고, 다른 반지를 또 하자고? 미친 새끼인가 정녕.
"내가 지금 되게 절절하게 구.애. 하는 중이잖아요. 맞죠, 카즈상?"
본인 또한 맘에 들지는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와키타는 억지로 웃으며 후카츠에게 말했다. 숨겨진 비밀은 오직 둘만 아는 프러포즈 공격의 전말은 지금으로부터 약 5개월 전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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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키타 에이지.
그는 누구인가.
일본이 낳은 최고의 신성.
NBA 최초 아시아가 낳은 에이스.
이런 대단한 수식어가 붙게 된 그의 나이는 이제야 20대의 중후반을 지나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손에서 농구공을 놓아 본 적이 없는 그는 당연하듯이 국내의 정상을 찍으며 고교 생활을 보내다 대학 리그를 뛰기 직전 미성년자의 마지막 장에 더 튼 꿈을 좇아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로는 물 보듯이 뻔한 승승장구 상승가도를 달리며 성공한 프로 농구선수로 지내오고 있었다. 여느 스타 선수들과 같이 작은 토크쇼도 나가고 심심치 않게 대쉬도 받으며 부러워할 만한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갔다. 종종 스캔들도 나는 편이었지만 대다수는 가십이었으며 태생부터 농구에 미친 인생답게 그에게는 24시간 365일 농구공을 튀기는 것 외에 관심을 크게 두는 것은 없었다. 그런 그의 순탄한 인생에 어느 날 벼락이 떨어졌다.
"....................비자...만료요......?"
비자 만료.
미국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던 탓에 이 천조국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눈앞에 자신의 매니지먼트에서 나온 팀장은 머리를 부여잡고 있고 이민국에서 나온 직원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아니네요 거의 1년 가까이 저희 이민국 쪽에서 수차례 제출 서류와 서면 요청이 있었는데 제출하지도 않으시고 서면 요청도 거절하셨더라고요."
"네? 우편으로 해당 사항이 왔었다는 소리신가요?"
"네, 이번에 새로 제도가 바뀌면서 갱신하는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이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우편 또는 서명 요청을 드렸습니다. 사와키타 선수는 그에 전혀 응하지 않았고요. 제가 얼핏 듣기로는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도 한참 그 문제 때문에 조심하라고들 하고 다녔다고 들었는데, 혹시 선수님은 들으신 적이 없으실까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로커에서 선수들끼리 이민국, 우편, 비자 어쩌구하며 사담을 나누던 것을 들었던 것 같지만 그 또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듯했다. 그때는 그냥 이러저러한 사회성을 위한 잡담 정도인 줄 알고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던 사와키타였다. 또 생각해 보니 최근 비자 문제로 추방당해 리그 유망주였던 선수 하나가 있다며 조심하라고 했던 코치 얘기 또한 기억이 번뜩 났다. 그 선수의 처지가 자기 자신에게 해당할 줄은 전혀 몰랐지만. 이민국 직원과 얘기하던 팀장에 사와키타는 둘 대화 사이를 끼어들었다. 최근 전지훈련이다 뭐다 집에 들어갈 새도 없었으며, 우편물을 확인 할 새도 없다고 판단하여 쌓아두기만 했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없었으며 서면 요청에 관한 것 또한 자신이 집에 계속 없어서 본인 확인이 되지 않아 반려된 것 같다 라는 말을 했다. 한숨을 푹 쉰 팀장은 이민국 직원과 얘기를 이어갔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듯한 이민국 직원은 방법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짐을 정리해 사와키타 이름이 쓰여 있는 서류 더미 몇 개를 건네주고는 문밖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팀장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사실 팀장이 몇 년 전부터 자신에게 붙여준 매니저이자 개인 코치인 후카츠상이 우편물 관리 잘해야 한다며 요 몇 달 당부했다. 그때 또한 앞서 생각났던 이러저러한 소문과 일들과 같이 알아서 할게요 하며 넘겼었는데 사와키타는 이제와서야 그때의 자신을 매우 원망했다. 팀장은 자신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냐며 K(후카츠상의 애칭이다)가 너한테 당부한 이야기의 반만 들었어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말을 안 들어서 생긴 일이 벌써 3번째 다, 전에는 해결이라도 할 수 있었지 지금은 할 수가 없다 등 걱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물론 뭐가 되었건 자신이 농구를 못하게 된 것이다 라는 사실이 사와키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은 변치 않고 있지만. 평소 잘 굴러가지도 않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자 만료면 국내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일본 리그 들어가면 또 적응에만 몇 달이 걸릴 텐데 버틸 수 있을까. 몇 달 동안 적응 트레이닝만 하는 걸 텐데 그러기는 너무 싫은데. 지금 미국에서 자기가 쌓아놓은 명성이 이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건가. 왜 적극적으로 얘기를 안 한 거야 후카츠상은.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없나. 저번에 보니까 비자 연장 어쩌구하면서 얘기하던 동료가 있었는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사와키타 눈에 직원이 두고 간 서류더미가 보였다. 사와키타 에이지. 남성. 20XX년 미국 입국. 비자 만료. 승인 거부. 여러 가지 사와키타에 대한 개인 내용이 쓰여 있는 서류를 보다 한가지 사항이 눈에 확 하고 들어왔다. 서류를 들어 올려 뚫어져라 보던 사와키타에 팀장은 '뭐 하는거야?' 라며 물었다.
"비자 만료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요? 연장을 할 수 있는 방법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예요?“
들어 올린 서류를 내려놓고 자신을 씨익하고 웃으며 바라보는 사와키타에 팀장은 아주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와키타의 뒷모습을 보며 팀장은 생각했다. 저 농구 망아지가 사고만 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래야 K가 더 오래 다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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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키타 에이지. 남성.
그리고
미혼.
사와키타가 생각한 비자 연장 방법은 결혼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주 가까운 곁에 비자 연장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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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츠는 여느 때와 같이 선수의 케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선수의 하루 운동 루틴부터 참견해야만 하는 사생활까지 한 선수의 모든 것을 케어하는 것이 후카츠가 몸담은 일이다. 전문용어로는 매니지먼트라고 부르지만, 업계인들 사이에서는 베이비 시터라는 말을 종종 하고 있었다. 경력 하나 없이 오직 농구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신입 시절에서부터 맨몸으로 일을 해온 그인지라 어느 정도 요령도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방법도 터득했다고 나름 자부하며 성공적으로 일을 해왔다. 물론 그 생각도 사와키타 에이지라는 선수를 만나고서 와르르 무너졌지만. 사와키타는 후카츠 인생에 재앙 같은 존재로 통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아독존. 취미도 농구, 직업도 농구.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농구로만 머릿속이 가득찬 망아지. 본인이 힘들지 않으면 남도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럼 배려라고는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단점만 나열하다 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나마 후카츠가 생각한 사와키타의 장점은 사회성이 썩 좋지 않아 인간관계가 좁다는 점 하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에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던 선수는 사생활이 너무 문란해서 골머리가 아팠다면 이번에는 그런 쪽으로는 문제가 거의 없다는 것? 물론 그것 빼고는 다 문제였지만. 꼭두 새벽부터 팀장이 자신에게 콜을 해오는 일은 매우 적었다. 이쪽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새벽부터 불이 나게 울리는 폰이 어떤 걸 의미하는 지 알았기에 Cap이라고 쓰여진 폰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외국인 선수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국기를 달고 날아다니는 뛰어난 선수라고 해서 이 나라가 그들의 국적에 관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민국의 나라답게 체류에 대한 건 그가 누구건 칼 같단 말이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사와키타의 하루 루틴을 보면 뭔가 벌금 고지서가 날아올 일도 딱히 없어 우편을 확인하는 편도 아니며, 그렇다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누군가가 있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거는 매니지먼트 쪽을 통해서 오고 가니 당연하게도 사와키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엄연하게 따지자면 사와키타가 벌어온 돈을 받는 쪽인 후카츠가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후카츠 또한 간과했던 점이 있었다. 사와키타 이 자식이 처음에 이민국에서 심사를 볼 때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자료를 본인의 집 주소로 돌렸다는 걸 몰랐다. 서류 몇 개를 뒤져보고 시기를 따져보니 매니지먼트가 생기기 전의 일이었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후카츠 또한 생각하지도 못했다.
평소 사와키타 에이지라는 선수는 남이 실수를 한다고 성질을 내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것과는 다르게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네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바로 빙긋 웃으며 ‘네가 해결 해줄거지?‘ 라는 얼굴로 바꿔 빤히 쳐다본다. 안타깝게도 이런 태도는 후카츠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태도였다. 당연하게도 사와키타에게 근본적으로 이 행동은 악의가 없다. 내려다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은 농구 선수니 본인보다 작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 생긴 일이고 그에게는 돈을 주고 부리고 있는 입장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악의 없는 행동과 태도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싹수가 노래 보였으며 거만하고 예의라고는 없어 보인다는 생각까지 들게끔 했다. 물론 이 또한 후카츠의 입장이다. 새벽 콜을 받자마자 훈련을 간 빈 사와키타 집에 들어가 우편물을 뒤집어엎어 쓸어 담았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분류하여 문제가 되었던 우편물들을 발견해 확인했다. 이민국을 상대로 하는 싸움은 99.9 퍼센트 지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느 쓰레기 언론이나 대중들과 같이 돈이나 다른 이슈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덩치가 아니었다. 국가 기관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후카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이라도 사직서를 메일로 보내고 튀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띵딩딩-
점심시간을 알려주는 안내 방송음이 들렸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단 새벽부터 빈속에 커피만 들이켰던 주린 배에 기름칠을하면 뭔가 생각이라도 나겠지 싶어 벗어둔 사원증을 매고는 탁-하고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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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결혼해요, 후카츠 상"
"......................................네.........?"
누가 프러포즈를 구내식당에서 하죠? 아니 그것보다 후카츠 라니. 나?
이 농구 망아지가 드디어 머리에 총을 맞았구나.
후카츠가 식당에 도착해 밥을 받고 자리에 앉아 이제 막 한 숟갈 뜨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에 일식 백반이 메뉴였던지라 먹음직스러운 텐동에 감격하고 있는 후카츠 앞 빈자리에 익숙한 빡빡머리가 눈에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냅다 결혼해달라니. 당황할 새도 없이 웅성거리는 구내식당 분위기에 옆 동료에게 밥 좀 대신 버려달라고 하고는 사와키타의 손을 이끌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탕비실 문을 열고 사와키타를 밀어 넣은 후카츠는 문을 잠갔다.
"미치셨습니까, 사와키타 선수님?"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지금 제가 미치고 팔짝 뛸만한 상황인 건 후카츠 상도 잘 알 거 아니예요."
"그래요. 네... 근데 뭐 다짜고짜 뭐요? 저랑 뭘 해달라고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후카츠에 사와키타는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이야기했다.
"이민국에서 비자 연장 허락이 제일 쉽게 나는 방법이 뭐일 것 같아요?"
"..."
"시민권이 있는 사람과의 결혼"
"...그렇죠"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요, 네? 아니 결혼 좀 해주세요, 제발."
지끈거리던 머리가 순간 띵 해졌다. 이 단순한 망아지는 지금 자기보고 사기 결혼을 하자는 소리라는 걸 깨닫고 하는 말일까.
"사와키타씨. 이거 범죄예요. 들키면 저는 깜방 행이고, 선수님은 선수 생활 박탈일 뿐만 아니라 영구 추방될 겁니다."
"그니까~ 우리가 안 들키면 되는 거잖아요...!"
"사와키타 에이지."
후카츠는 사람을 부를 때 정중하지만 친근하게 부르는 것 또한 예의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사람이 풀 네임을 불렀다는 건 아무래도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거거나 화를 내기 직전이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와키타는 운이 좋게도 매번 그의 한계점 언저리에서 놀았다. 그래서 후카츠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은 그가 5년 째 매니지먼트 및 코치를 하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그딴 개소리 하지 마세요. 이건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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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와키타의 고백 공격은 시작이었다. 대부분 후카츠가 일하는 시간에 매달리며 공개적으로 징징거리기 일쑤였고 안타깝게도 을의 입장에 처해있는 후카츠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와키타의 염병을 무시하는 쪽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징징거림을 견디고 있는 것뿐이었다. 주변 사람의 눈이 점점 많아지면서 곤란해지는 쪽은 후카츠 라는 걸 깨달은 사와키타의 공략법이었다. 그렇게 약 2달 정도 매일 같이 빠지지 않고 공개적으로 일방적인 구애(라고는 보이나 실질적으로 후카츠가 느끼기에는 사내괴롭힘 정도였다.)를 이어가던 사와키타가 갑자기 약 2주 정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제 지친거겠지 싶었지만 후카츠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 미친 망아지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라는 불안감이 계속 자리했다. 그리고 잔잔히 지내면서 선수 케어를 하던 후카츠에게 우리가 처음에 봤던 NBA 신성 사와키타 에이지의 농구 코트 위 로맨틱한 프러포즈 상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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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less situation / 답이 없는 상태
[정의] 어떤 상황이나 문제, 혹은 대상에 대해 해결할 방법이나 정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
후카츠는 눈앞에 보이는 단어가 자신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약혼반지가 끼워진 후 언제 비행기표를 끊었는지 짐 싸라는 말과 함께 티켓을 들고 주말에 집에 들이닥친 사와키타였다. 평화로울 예정이었던 사와키타의 주말이 아주 와장창 유리처럼 부서졌다. 애초에 기사가 신문 1면에 나자마자 이민국에 출석한 둘은 무난하게 인터뷰를 시작했으며 미리 말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매니저 생활 동안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요령껏 같은 대답을 해 의심을 피했다. 이민국 인터뷰가 끝난 복도에서 기가 빨려 죽기 직전인 후카츠에게 어디서 뽑아 왔는지 음료 하나를 건네주는 말간 얼굴의 사와키타였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은 풀어져 있지만 그에 반증하듯 딱딱하고 빳빳한 정장으로 빼입은 모습이 퍽이나 재수가 없어 보였다. 평소 스포츠웨어가 아니면 선수복을 입고 다니는 사와키타이기에 정장 차림이 여간 불편한 것인지 후카츠 옆에 털썩 앉더니 정갈하게 매여있던 자신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쳤다. 그 후의 일들은 일사천리였다. 짐을 쓸어 담다시피 챙겨 공항에 출국 대기를 하고 있는 후카츠는 미리 짜둔 사와키타와의 연인 관계에 대해 곰곰이 되뇌고 있었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짜낸 얘기에 외우거나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울 건 없었으나 깐깐한 자신의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일지가 참 걱정이 되었다. 출국장 안내 멘트가 나오기 시작하자 저 멀리서 커피를 사 오고 있던 사와키타가 후카츠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챙겨둔 짐을 정리하고는 커피 한잔을 건냈다.
"이제 들어갈까요, 자기야?"
장난기 서린 표정인 사와키타에 사적인 감정이 생기려고 하는 후카츠였다. 악감정도 사적인 감정이 맞지. 부하직원에게 자기라는 애칭을 하는 직장 상사라. 후카츠가 많은 일을 겪어 여기까지 왔지만, 그 많은 일 중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제일 판타지스럽고 정신적 타격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원수 새끼랑 결혼해야 한다니. 진짜 누가 이건 다 꿈이란다~ 하고 뒤통수 한 대 쳐 기절시켜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한 손에는 캐리어를 다른 한 손에는 건네준 커피를 마시며 94 arrival gate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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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내에서 후카츠는 사와키타에게 간단하게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카츠가 알려준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1. 지금 가고 있는 곳은 큰할머님과 부친, 모친 그리고 그 외의 친가와 외가 쪽 친척들이 사는 하나의 마을이다.
2. 본가에는 큰 할머님과 부친, 모친 그리고 자신이 같이 살고 있다.
3. 기본적으로 본인의 가족들은 예절과 예의가 아주 중요하며 외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4. 사적인 태도 보다는 공적인 태도로 대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5. 자신은 현재 본가에 대하여 어떠한 지원도 받고 있지 않으며 특히 아버지와 연을 끊다시피 살고 있다.
그냥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인데 아버지랑은 안 친한 거 아닌가....?
사와키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별거 없네 라는 생각과 함께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별 각 없어 보이는 사와키타에 후카츠는 마른세수를 했다. 평소 코트, 농구, 집밖에 없는 사람인 걸 뻔히 알고 사회성은 거의 없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과 붙임성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방금 자신이 한 당부의 말 조차 그러세요 라는 태도인 이 망아지가 잘할 수 있을지 아직 비행기가 땅에 착륙하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제발. 잘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얌전히라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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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 안했어요...?"
"...안 물어봤잖습니까...?"
사와키타는 평소 자신이 돈이 부족하다 또는 그러한 환경에 처해 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넘치지는 않지만, 외동인 자신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수 있는 가족들과 환경 그리고 현재 벌고 있는 연봉까지 넘치면 넘쳤지 한 번도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사와키타는 "부"에 대한 욕망 또한 없는 편이 없다. 그렇다고 아예 돈을 쓸 줄 모른다거나 부자에 속하는 인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본 광경은 달랐다. 비행기 착륙 이후부터 후카츠의 본가에 도착할 때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며 모셔 와졌으며 본가에서 진행되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 중인 지금까지 어안이 벙벙했다. 멍한 표정으로 5번째 착장으로 갈아입혀지던 사와키타의 질문에 후카츠는 바라보던 카탈로그를 텁-하고 덮었다. 작은 글씨와 화려한 이미지가 가득한 카탈로그를 바라보는 것이 무리였는지 평소에 쓰지 않던 무테안경까지 쓰고 한참 넘겨보던 후카츠가 눈이 피로하다는 듯 머리를 뒤로 누운 채 눈을 감고 대답했다.
"보통 직장 상사는 아랫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죠. 그래서 안 물어봤잖습니까."
"그렇ㅈ....지만 지금은 아니죠, 자기야?"
무심한 대답을 듣고는 아차 싶었는지 사와키타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애칭을 강조했다. 후카츠 또한 주변의 시선을 깨닫고는 흠칫하더니 사람들에게 잠깐 이야기를 하게 나가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알아들은 사람을 선두로 직원들과 함께 드레스룸 문을 닫고 일제히 나갔다. 시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사와키타는 목 끝까지 잠그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며 후카츠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평소에 돈을 안 쓰지 않았나요, 코치님?"
"예, 검소한 편이죠."
"진짜 부자들 재수 없다는 게 이런 건가. 검소 이러고 있네. 당신 지금 내가 입은 착장 1벌당 1만 달러는 그냥 넘어가고 있다는 거 알고 있는 거지?"
"본가에서 책정해서 알려준 파티 비용에 맞추는 것뿐입니다. 지금 있는 이곳 또한 저희 가족 중에 한 분의 브랜드일 뿐이니 크게 상관 안 쓰셔도 되는 부분이고요."
"지금! 지금 그런 부분이 재수가 없는 거라고요. 이래서 재벌들이란.... 아니 그래 이것부터 물어봐야겠다. 난 왜 일할 때 가명 비슷하게 이니셜로 부르라고 하나 했는데, 그게 이런 이유였던 겁니까?"
"후카츠 라는 성이 흔치는 않아서 구글에 영어로 쳐보면 금방 들통이 나서요. 보통 카즈나리로 소개했죠. 근데 한 번도 카즈나리라고 부른 적도 없으면서 이제서야 반응하는 것도 웃기네요."
"보통 남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게 한 재벌 기업의 가문 성씨일 것이다 라고는 절대 생각들 못 한다고요."
사와키타 에이지가 몰랐던 그의 매니저이자 코치의 비밀은 그가 어마무시한 재벌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시작해 전 세계 여기저기에서 호텔과 백화점을 운영 중이며 코스메틱과 의류 업계는 인수의 인수를 통해 덩치를 어마어마하게 키운, 이 기업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소리를 듣는 그런 재벌이었다. 무례하지만 평소 후카츠가 하는 행동이나 사는 집, 소비 수준을 보면 절대 의심하지 못했던 사와키타의 입장으로는 굉장히 난처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저 덜컥 혼인서류 한 장 쓰고 약 2년 정도 같은 집에서 남처럼 지낸 이후에 시민권만 얻으면 바로 이혼하고 알아서 갈길 가자 라는 계약 결혼 정도 생각한 상대가 재벌가의 일원이었다니.
"그럼 왜 지원은 안 받는 건데요. 이 정도 재력이면 그냥 좋아하는 농구 구단을 차리거나 인수하는 게 훨씬 편한 길 아닌가."
"...흔한 재벌가 가족들의 사정이죠."
하나뿐인 장자이니 가문의 일을 이어야 한다는 가족들과 그런 쪽으로는 능력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뭘 보고 자꾸 집안일을 이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반항하는 외동아들. 그런 포지션이었던 후카츠에게 지긋지긋한 강요를 벗어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경제적 독립. 고등학교까지는 여차저차 지원을 받아왔지만, 갈등 이후 모든 지원을 본인이 거부하면서 희망하는 과와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직접 돈을 벌어야만 했고 그러다 졸업 이후 일을 하며 지금의 직장에 오게 된 것이다. 지원을 받을 때도 그리 뭔가 크게 소비하고 수집하는 취미도 버릇도 없었기에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오게 되면서도 덜 쓰면 덜 썼지 더 쓰지는 않았다. 아마 그랬기에 사와키타 눈에 검소하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재수없어. "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던 가족사와 방금 말해주던 이야기들을 조합해 보니 화목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평범한 가정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는 사와키타였다. 후카츠의 이야기를 반쯤 누운 채로 듣고 있던 사와키타는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재수 없다고 말하는 사와키타에 힐끔 표정을 살핀 후카츠였다. 일이 끝낸 직후 긴장 상태로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자마자 지금 풀어 헤친 착장까지 총 5번째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벗을 수 있는 것들을 갈아입었으니 피곤에 쩔어 끔뻑거리며 헛소리를 할 만했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사와키타 얼굴 위로 따뜻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사람도 물렸고,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체력 비축이나 하십쇼. 1시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와키타 눈에 따듯하게 올려진 후카츠 손이 낯설어 소름이 끼칠뻔했지만, 후카츠가 뱉은 말이 맞다고 판단해 사와키타는 몰려오는 수마를 받아들였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 잘자 라며 나지막이 건네오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비몽사몽 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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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후카츠의 가족들과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후카츠의 손에 이끌려 그의 모친을 먼저 만났고, 이어 그녀의 손에 이끌려 고모님들과 큰 할머님을 같이 뵙게 되었다. 후카츠의 독립 이후에도 계속해서 꾸준히 연락하며 지내왔는지 여성 친척들과는 생각보다 유한 분위기에 농담조의 타박과 평범한 안부 묻기가 오갔다.
"이렇게 건실한 청년을 사귀고 있었으면서 이야기를 안 했니 너는."
"죄송해요. 그때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라 말씀을 못 드렸어요."
건조하지만 걱정 가득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후카츠와 후카츠의 어머니. 사와키타는 둘의 모습을 보며 두꺼운 입술과 무감각해 보이는 눈매는 외가 쪽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손에 들린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후카츠의 친가 쪽으로 추정되는 분들을 소개받았을 때와 달리 유달리 닮았다고 생각이 되어 신기하다는 듯 계속 쳐다보게되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는 거 무례인 거 아는 거죠?"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마치고는 꾹- 하고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후카츠에 싱긋하며 웃으며 너무 미인이시라 하며 능청거리는 사와키타에 후카츠는 살짝 한숨을 쉬며 손을 이끌었다. 평소 더티톡이 난무한 경기장이나 인터뷰에서 사와키타 본인의 성질을 못 이겨 기어이 사고를 쳤던 때 자주 지었던 후카츠의 표정이었다. 계약상이지만 결혼 예정인 애인의 가족이 재벌인 걸 알게 된지 반나절 정도 된 자신이 정도면 비위를 잘 맞추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은 했지만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크게 아쉬운 쪽은 사와키타였기에 사실 비위를 살살 맞춰야 하는 것 또한 그였기에 최대한 사회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와 소개를 이어가던 사와키타에게 사건이 터진 건 후카츠의 친부와 대면하게 된 순간이었다.
친가 쪽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어느정도 예상은 했었다. 특히 남성인 친척들의 인상이 자신이 덩치가 조금만 작았더라면 충분히 얼어붙을 수 있는 사납고 아우라 있는 인상들이었는지라 후카츠의 아버지도 비슷한 느낌이겠지 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늦게 들어온다고 말했던가 웅성거리던 장내가 조금씩 조용해져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두리번거리다 후카츠가 이제부터 정신 차려 라며 귓속말을 했다. 아버님의 첫인상은 호랑이였다. 이게 재벌가를 이끄는 사람의 포스인 걸까 싶을 정도로 아우라가 큰 사람이었다. 여러 경기를 돌며 분위기가 장난 아닌 거장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살벌한 느낌은 처음 느껴봤다.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는 분명 인사를 위해 고개를 숙였지만,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예의가 없다기 보다는 한 번도 밑에 였던 적이 없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스쳐 지나간 후로 어머님의 곁으로 가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후카츠에 알겠다고 하고 계속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다 틈이 나 후카츠가 저를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아버님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조곤조곤 둘이 아까 다른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분위가 또한 험악해지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제가 이래서 본가로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회장님."
이 한마디를 끝으로 아버님에게서 등 돌리더니 저 자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곤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열린 테라스로 나가자 아무도 없는 걸 확인 하고는 후카츠는 창문 커튼을 확 쳐버렸다. 무슨 얘기를 한 건지는 감도 오지 않지만, 확실한 거는 좋은 이야기가 오간 건 아니라는 것이다. 커튼 틈 사이로 웨이터를 조용히 부른 사와키타는 새 샴페인 잔을 두 개 손에 들고 후카츠 옆으로 다가갔다.
"술 필요한 거 같은데?"
"... 반박할 이유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술이 고픈 건 아니었지만 방금 아버지와의 대화로 술이 땡겨진 후카츠였다. 딱 알맞은 타이밍에 가득 찬 잔을 가져다준 사와키타에 눈치도 볼 줄 아네 하는 생각을 했다. 목이 탔던 것처럼 한 번에 마셔버린 후카츠에 사와키타는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술 마시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회식 자리가 아닌데."
"애초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도 실수 할까봐 잘 먹지 않는 편이고요."
"영 말이 안통했나봐요.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만."
"원래도 통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기대도 안 했지만 별 얘기를 다 해서 더 버티다가는 진짜 한 소리 할 것 같아 지고 나온 겁니다."
"표정은 진 사람이 아닌 거 같던데..."
"...지금 내가 화났다고 말하는 걸로 안 들려...?"
"어우, 반말이 너무 자연스러워...평소에 존대는 어떻게 쓰셨담."
"이제 와서 뭘 놀라는 거야. 심지어 내가 연상입니다."
"알죠~ 그래서 어제오늘 말 잘 들었잖아요~"
제 딴에는 농담조 던진 말이 신경을 더 긁었는지 영 시원찮은 후카츠에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후카츠가 아버지에게 들은 말은 대부분 저에 대한 모욕과 함께 후카츠에 대한 모욕이었다. 대충 들으니 화를 낼만 했네. 졌다고는 했지만 상처는 받을 대로 받은 사람의 모습에 영 짠해진 사와키타였다. 평소 친한 동료나 지인이었다면 본인의 가정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위기와 싸움에 그러려니 했지만 계약이지만 입장이 가족으로 묶인 이 시점에서는 살짝 달랐다. 중얼거리는 후카츠 주위로 점점 우울한 기운이 늘어나기 전에, 항상 반듯하던 저 등과 어깨가 더 쳐지기 전에 분위기 전환을 시켜야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괜찮을 거예요."
"그렇죠. 화상으로 봤을 때부터 엄청 화목해 보였는데."
"원래 친가가 문제면 외가는 괜찮다 그러던데. 그럼 내가 신부측인건가?"
"....예?"
"신부랑 신랑 측 둘 중에 하나는 괜찮으면 된 거지. 정 뭐하면 대충 마무리 하고 저희 집 쪽으로 튀어요."
나름 해결책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와키타의 모습에 후카츠는 웃음이 빵 터졌다. 생전 일을 하면서도 이 정도로 웃어 본 적이 없는데 진짜 오랜만에 어이가 없어 빵 터진 후카츠였다. 사와키타는 처음 보는 후카츠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진짜 진지하게 한 말인데 이걸 이렇게 빵 터진다고...? 웃다가 울기까지 했는지 눈가를 닦으며 숨을 고르는 후카트에 얄미웠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아까보다는 훨씬 좋아 보여 마음은 편해졌다. 그리고 일을 같이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후카츠의 웃는 모습에 살짝 설렘을 느낀 걸지도 몰랐다. 실내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은은하게 아른거려 눈가를 훔치고 있는 후카츠의 모습이 어딘가 꿈만 같다고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후카츠와 어찌저찌 하게 된 결혼이 그래도 남들과 같은 평범함을 가질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사랑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사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후카츠상. 어려운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다 나눠 가질 테니까 우리 한번 잘살아 봅시다?"
"하... 그래요. 그래봅시다, 자기야."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부딪치고는 장난스럽게 러브샷을 요청하는 사와키타에 평소라면 뭐 하는 짓이냐고 했겠지만, 마음이 동한 건지 흔쾌히 장난에 응해준 후카츠였다.
웅성거리는 실내. 조용한 테라스. 흘러나오는 음악과 빛. 완벽할 수는 없지만 차차 서로의 퍼즐을 맞춰 나가는 둘이었다. 영 다른 둘이지만, 이날의 잔잔한 건배를 시작으로 막연히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