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上
보지 않을 때
타인의 불행은 그게 어떤 형태이든 으레 자신과는 상관없어 보이게 마련이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불시에 실명하는 전염병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처음 볼 때만 해도 명헌은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이라기보다 이 병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탓이었기에 누구도 그를 무감하다 비난할 수는 없다. 어떤 전염병인고 하니, 기저질환이 없던 사람도 눈앞이 하얗게 멀어버린단다. 보통의 실명처럼 까맣게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떠도 감아도 온통 새하얗게. 저 병에 걸리면 농구는 못 하겠구나, 1 더하기 1은 2라는 말과 같은 당연한 명제를 명헌은 떠올렸을 뿐이었다. 농구부에서 미국 원정 경기를 다녀와 일주일이 지난 차였다.
명헌이 뉴스를 본 그 날, 방역당국에서 학교로 연락을 했다. 학교장 주관으로 긴급히 교사 회의가 열렸다. 교장실을 다녀온 도진우 감독은 어두운 얼굴이 되어 농구부를 소집했다. 미국에서 친선전을 한 농구부에서 발병자가 나왔단다. 따라서 그들과 경기한 주전들은 '보균자'로 기숙사 내에서 격리하고 나머지 인원은 '접촉자'로 분류해, 훈련도 수업도 모두 열외라는 공지였다.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격리 병원으로 이송될 거다. 말을 마친 도 감독은 아이들의 얼굴 위로 삽시간에 퍼진 공포를 한눈에 보아야 했다. 비명 같은 정적 이후 수군수군 혼란이 찾아오는 사이로 한 아이가 질문했다. 집에 가 있으면 안 되나요? 감독이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조건 격리해야 한다.
“그럼 반의 다른 애들은, 뿅. 저희랑 접촉한 애들요.”
보균자의 접촉자가 격리 대상이라면 보균자의 접촉자의 접촉자는 무엇이 되는가? 굴레의 끝이 어딘지 혼란스러웠던 명헌이 물었다. 옳은 질문이었으나 전염 경로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은 답을 줄 수 없는 어른이 되어 무력했다. 이럴 때일수록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다독여야 하건만 그도 방금 전 격리대상이 된 사유로 평정을 유지하는 데 많은 심력을 소모 중이었다. 또 다시 고개를 내젓는 수밖에 없었다. 명헌은 점심 급식으로 나온 소세지를 제게 나눠준 동급생을 떠올렸다.
오후 나절, 학교가 한바탕 소란했다. 모든 학사일정을 잠정 중단하고 교문이 폐쇄됐다. 등교했던 수백 명의 학생이 우르르 퇴교하고, 기숙사도 격리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대대적인 이사가 있었다. 총 4층에 이르는 기숙사 건물을 반으로 나눠 1-2층이 접촉자용, 3-4층이 보균자용으로 구분되었다. 동선도 분리돼야 했기에 동측 계단이 접촉자용, 서측 계단이 보균자용으로 차단봉을 두어 통제되었다.
“방은 아무데나 쓰면 되나요 뿅.”
보균자로서 격리동 관리를 맡은 도 감독에게 묻자 호실은 자유롭게 쓰되 학년끼리 짝지어 쓰도록 지시했다. 명헌은 복도 가장 끝방을 선점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4층 방에 들어가 보니 폭풍이 지나간 듯 허둥지둥 짐을 뺀 흔적이 역력했다. 미처 못 챙긴 짐도 있었다. 침대 밑에 어떤 모서리가 슬쩍 튀어나온 것을 집어들고 보니 야한 잡지였다. 명헌은 슬쩍 웃었다.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둬야겠다 뿅. 잡지는 다시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문간에서 소리가 났다. 명헌의 룸메이트가 도착했다. 부주장 정성구였다. 명헌아, 이게 다 무슨 일이래냐? 뿅. 침착한 탄식이 인사 대신 오갔다. 차츰 각 방이 채워졌다. 명헌과 성구의 맞은편 방에 최동오와 김낙수, 그 옆으로는 신현철과 정우성이 입실했다. 산왕공고 기숙사는 본래 한 층에 22개실로 4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나 지금은 주전과 3학년들이 십여 개 방만을 차지하니 공간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계절은 늦은 봄, 복도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노랗게 허공의 먼지를 비추는 광경이 여유롭기까지 했다.
“1인 1실 하면 안 되나?”
“1인 6실도 가능 뿅.”
사상 초유의 전염병으로 격리된 상황만 아니라면 방학이나 다름없는 기분에 시덥잖은 소리를 주고받을 때쯤 도 감독이 방문했다. 명헌의 옆방을 쓴다는 소식이었다. 아, 감독님 너무 가까운데. 집들이 하듯 방에 놀러온 우성이 아쉬운 소리를 했다. 명헌의 1층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는 궁둥이가 자연스럽다. 이 방이 해가 잘 드네요, 다음에 여기 찜해야지.
“병에 걸렸다는 미국 애, 참 안됐어요.”
“농구도 못하고 뿅.”
“응.”
우리도 곧 같은 처지가 될 텐데 무슨 오지랖이냐, 핀잔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눈 먼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전염병이란 게 그렇다. 고통의 본질이기도 하다. 자신이 직접 겪기 전까지는 절대 공감하지도, 완전히 연민하지도 못한다. 짐 정리하는 성구를 넌지시 건너다보던 우성이 명헌에게 속닥였다.
“걔랑 이메일 주소도 교환했는데.”
“누군지 알아?”
“센터 토마스요. 감독님께 여쭤봤어요.”
“뿅…….”
센터를 주로 상대한 건 마찬가지로 센터인 성구인데. 전염병이란 아무래도 접촉 거리가 가깝고 빈도가 높을수록 감염 확률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이며, 뉴스를 통해 알려진 바로는 이번에도 예외가 없다. 우성이 낮게 덧붙였다. 말 안 할게요, 아무한테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 명헌은 성구의 뒤통수를 지켜보다 그가 눈길을 느끼고 이쪽을 쳐다볼 때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농구나 하러 가자 뿅.”
“지금요?”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야 함 뿅.”
명헌의 제안으로 소집된 농구부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대부분 기숙사 생활이나 합숙에 익숙했던 덕이 크다. 무엇보다, 고민하거나 걱정해 보았자 답이 없는 상황에는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잘 안다. 매 순간을 불태우는 데 가장 능한 것이 스포츠맨이니. 산왕은 차라리 농구를 원 없이 했다. 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격리 전후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축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기숙사 점호가 느슨해진 점으로, 덕분에 일상의 거리가 한층 더 촘촘해졌다. 예컨대 이른 새벽 우성이 명헌의 방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다. 방을 옮기면서 실수로 양말을 몽땅 두고 왔으니 좀 빌려달라는 용건이었다. 빤스는 필요 없냐 뿅. 양말 대신 팬티를 내민 명헌의 장난에 우성이 빽 소리질러 모두를 깨우는 일이 있는가 하면, 이따금 한밤중 한 방에 모여 카드를 갖고 놀기도 했다. 종목은 원카드, 내기 용건은 빨래 몰아주기.
“합숙훈련 같다 뿅.”
“그치? 훈련 없는 합숙훈련.”
“지금 대회 나가면 우리 포텐 최고일 텐데.”
인터하이 본선 두 달 전이었다. 그리고 우성의 출국 세 달 전. 사태가 빨리 수습된다면 뭐든 가능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이는 일이었다. 야, 빨리 내. 낙수가 명헌의 옆구리를 툭 쳤다. 명헌은 벽에 걸린 달력에서 눈을 떼고 카드 더미를 한 장 뒤집었다. 스페이드 에이스. 패를 확인한 눈이 우성에게 향했다. 당연하게도 미국 원정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녀석으로, 아예 미국행을 결정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으니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 양손에 패를 한가득 쥔 우성이―원카드는 가진 패가 적을수록 좋은 게임이다―자문하듯 물었다.
“언제까지 이럴까요?”
큰 유감이 묻어나지 않는 억양이지만 동오가 얼른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 세 달이면 치료제든 백신이든 뭔가 나오지 않을까? 게임 순번대로 대화가 이어졌다. 성구가 패를 하나 내려놓으며 맞장구쳤다. 그래야 우리도 집에 가지. 낙수는 세 달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 대신, 원카드를 외쳤다. 다음 순서인 현철이 보탠다. 우리 산최미는 내가 책임지고 유학 보낸다―나도 원카드! 명헌의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한 달 안에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원카드 뿅! 우성이 두 손 들어 기권했다. 저 파산이요.
“대신 쿠폰 하나 쓸래요. 도우미 쿠폰.”
동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폰이 있었어? 우성이 씩 웃었다.
“저 불쌍하니까 있다고 치고요. 빨래 도와주세요, 명헌이 형.”
“나 원카드 뭐하러 열심히 했냐 뿅.”
말과 달리 명헌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네, 방 치워놓고 가라 뿅. 남은 동기들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세탁실은 예로부터 많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친구와 짝사랑 상담을 하거나, 선배에게 진로상담을 하거나, 전통적으로 농구부 주장이 부원에게 고민상담을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명헌은 우성이 상담을 원해 자신을 도우미로 지목했다고 여겼으나, 우성은 예상외로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명헌의 얼굴을 힐긋거리면 했지. 기다리다 못한 명헌이 먼저 운을 뗐다. 상담 필요하냐 뿅. 우성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상담, 상담이요? 명헌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얼굴은 왜 빨개져?
“힘들어서 나 부른 줄 뿅. 유학을 못 갈 수도 있니까.”
“좀 실망스럽긴 한데, 그건 괜찮아요. 선배들이 신경써 주는 것도 힘이 되고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믿어요.”
“해결 안 되는 건 뭔데 뿅.”
“인터하이를 같이 못 뛸지도 모르잖아요. 난 형이랑 우승할 건데.”
“건방지다 뿅. 우승이 옆집 개 이름이냐 뿅.”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거예요.”
결의와 오기, 약간의 오만이 담긴 말이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명헌이 손바닥으로 우성의 엉덩이를 팡 내리쳤다. 아, 뭐예요! 명헌이 우성의 손에서 핑크색 섬유유연제를 빼앗아 들었다. 한가한 소리, 병이나 안 걸리고 해라 뿅. 엉덩이를 문지르던 우성이 말했다. 그거 말인데요, 형.
“살다보면 이상한 확신이 들 때가 있잖아요. 예를 들면, 산왕에 반드시 합격할 것 같다든지, 원정경기가 나한테 어떤 전혀 새로운 경험을 줄 것 같다든지. 저는 그랬거든요?”
뿅. 명헌이 섬유유연제를 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성이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것처럼,
“왠지 저는 병에 안 걸릴 것 같아요.”
“뭐?”
명헌이 황당해하며 우성을 돌아보았다. 농담을 하나 했더니 웃음기 하나 없이, 당당하고 솔직한 눈이 곧바로 마주쳤다. 명헌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우성, 몰래 신사에라도 다녀왔냐 뿅. 아! 들켰네요.
“그러니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형이 눈이 멀게 되면, 제가 꼭 지켜줄게요.”
이상한 다짐이었다.
“현철도 있고 성구도 동오도 낙수도 있는데. 왜 하필 나지 뿅?"
“어, 그건…….”
우성이 말을 끌며 뒷목을 문질렀다. 시선이 세탁기를 향했다가, 방 모서리를 향했다가, 다시 명헌을 향했다.
“쿠폰!”
“쿠폰?”
오늘 쓴 쿠폰 갚을게요, 세 배로. 우성의 말에 명헌이 피식 웃었다.
“세 장이나 뿅?”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감고 맞댄 손가락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복사에 코팅도 하지 뿅? 명헌이 손바닥을 내밀자 우성이 후다닥 떨어졌다. 저, 놓고 온 빨래가 있어서, 제가 마저 할 테니까 형은 가서 쉬어요! 명헌은 약속 도장을 찍었던 손을 한 번 그러쥐고, 우성이 사라진 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세탁기가 덜커덩거리며 돌아갔다. 익숙한 소음이 가득한 세탁실은 전염병이 발생이라기엔 현실감 없이 안온했다. 명헌이 중얼거렸다. 딱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는데.
*
명헌의 바람을 비웃듯 병은 천천히 실체를 가지고 학교를 압박해 왔다. 여느 때처럼 체육관에 모여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끼긱거리는 농구화 마찰음과 거친 숨소리, 이따금 기합 소리만 산발적으로 튀던 실내에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재선아! 맞은편에서 패스를 던진 부원이 소리치며 공에 맞아 넘어진 파트너에게 달려갔다. 달려가다, 명헌의 팔에 가로막혔다.
“접촉 금지 뿅.”
모두의 눈이 향한 곳, 학생 한 명이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돌연 새하얀 허공만을 보게 된 눈을 마구 비비는 채로.
그게 시작이었다. 패스를 받으러 뛰다가 넘어지거나, 별안간 괴성을 지르거나, 조용히 훈련에 불참하는 인원이 점차 늘었다. 눈이 먼 학생이 과반이 되면서부터 단체 훈련은 중지되었다. 아무도 서로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보균자가 아닌 접촉자 중에서도 눈이 머는 부원들이 속출하는 것이 문제였다. 더 이상 분리해서 격리하는 것이 의미 없었다. 실명한 아이들은 나머지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남겨둔 채 연일 병원에 실려갔다.
그러나 혼돈한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명헌은 도 감독을 도와 학교 정문을 통해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다녔다. 교문 경비는 삼엄했다. 잠긴 철문으로부터 사방 십 미터 가량이 철조망 쳐진 바리케이드로 봉쇄된 가운데,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한쪽을 열고 무장한 관리당국 직원 몇명이 바퀴 달린 끌차에 도시락이 수십 개씩 담긴 박스를 쌓아 끌고 들어온다. 봉쇄구역 가운데에 박스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두고 되돌아가 바리케이드를 닫으면 그때 학교측이 도시락을 가지러 다가가는 것이 규칙이었다. 도 감독은 하루에 한 번, 앞을 지키는 직원에게 고함치듯 물었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직원이 소리쳤다. 말도 마쇼, 학교 안이 제일 안전해요.
그날은 심부름에 자원한 우성이 함께였다. 쿠폰을 왜 안 쓰냐는 타박을 명헌은 아껴 쓰겠다는 말로 응수했다. 쿠폰 안 썼는데도 이렇게 왔으니 이득 뿅. 도시락을 회수한 두 사람은 도 감독과 함께 기숙사로 복귀해 1층에서 헤어졌다. 도 감독은 동측 계단을, 명헌과 우성은 서측 계단을 향했다. 명헌은 먼저 돌아선 도 감독에게 꾸벅 인사하고도 발을 떼지 못했다. 우성이 명헌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슴푸레한 계단참을 뚜벅뚜벅 계단을 오르는 도 감독의 등이 보였다. 같은 햇살이 들이쳐도 서늘한 정경이었다. 우성이 명헌에게 물었다. 갑자기 눈이 멀면 밥 먹기 힘들겠죠? 힘들겠지 뿅. 대꾸한 명헌이 우성을 한 번 돌아보았다. 넌 밥이 제일 걱정이냐 뿅.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앞도 안 보이는데 잘 먹어야 살죠.
“그렇지, 살아야지.”
어둠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림자가 꿈틀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곧 학교 전체를 집어삼킬 그림자였다. 명헌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털었다. 다시 바라본 복도는 방과 후 학교가 그렇듯 조금 어둡고 고요할 뿐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복도를 돌아다니던 실루엣 하나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듣는 이의 머리가 쭈뼛 서고 두 다리가 굳는 소리. 도시락을 나누기 위해 앞서간 우성이 명헌을 불렀다. 명헌이 형, 왜 그래요? 명헌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우성을 뒤따랐다. 도시락에 든 흰밥과 반찬은 차갑고 굳어 맛이 없었다.
“연습 가자 뿅.”
식사 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던 성구가 고개만 들어 반문했다. 뭐? 연습?
“도 감독님이 훈련도 멈추셨는걸.”
“귀신 퇴치에는 양기가 최고 뿅. 시체놀이 하지 말고 뿅.”
“갑자기 귀신 타령? 알았다 알았어. 애들 부를까?”
“정우성이 부르러 갔음 뿅.”
4 5 6 7 8 9. 한자리 수 등번호들이 옹기종기 체육관에 모였다. 날이 좋았다. 명헌은 높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을 한 번, 친구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다들 괜찮지 뿅? 무엇을 묻는 것인지는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직은 뭐. 낙수가 대꾸한다. 아, 준익이가 연습 있으면 불러달랬는데. 동오가 몸을 풀며 10번을 찾았다. 걔 어제 실려갔어. 현철이 대꾸했다. 아. 무리 가운데 울리는 짧고 깊은 탄식을 우성이 짝, 하는 박수로 끊어냈다. 저희 연습경기 해요, 삼 대 삼!
그렇게 시작된 경기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한 팀이 지면 팀원 구성을 바꿔 다시 뛰고, 성에 차지 않으면 여러 번 반복해서 뛰었다. 멀찍이 도 감독이 와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가열차게 뛰었다. 가장 불꽃 튀는 대결은 단신 대 장신. 볼 것 없이 장신의 승리가 예상되는 이벤트 조합에서 개중 최단신인 낙수가 눈에 불을 켰다. 재밌겠네 뿅. 무감한 듯 굴던 명헌이 현란한 드리블과 백핸드 패스로 낙수의 슈팅을 서포트해 역전승을 노리던 때. 끼긱. 명헌의 발이 멈췄다. 벤치에 앉은 도 감독이 차분히 그를 불렀다.
“명헌아, 가서 방역국에 전화 좀 해 주련.”
앞이 안 보이는구나.
퉁. 농구공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
온통 흰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각기 등에 소독장비를 짊어지고 체육관에, 기숙사에 도착했다. 아니, 쳐들어온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얀 소독약이 연기처럼 체육관을 메웠다. 명헌은 어릴 적 동네를 지나는 소독차 뒤를 따라 달리던 때를 기억한다. 흐릿하게 보이는 트럭 꽁무니에만 집중하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때. 눈을 감으나 뜨나 새하얀 빛이라는 그 병에 걸리면 이런 기분일까? 방역 스프레이를 든 사람이 옆을 지나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했다. 하얀 시야에 까만 총부리가 스쳤다가 환상처럼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도 감독이 홀로 목격했을 일이었다. 그는 구급차를 향해 반쯤 끌려가며 계속해서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얘들아, 괜찮을 테니까, 걱정 마라. 엉뚱한 방향을 향해 말하는 모습에 명헌은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제 엄마랑 통화했는데, 학교라서 저런 것도 해주는 거래.”
성구와 함께 남아있던 현철이 방역팀을 지켜보느라 우두커니 서 있는 명헌의 어깨를 짚었다. 명헌도 알았다. 밤에 몰래 트는 라디오에서 속보가 끊이지 않았다. 뉴스에 따르면 학교나 유치원 등의 교육시설은 공무원이나 자원한 예비군이 소독 방역을 하지만 바깥은 무장한 군인이 방역과 관리를 도맡아 발병자를 병원에 수용한다고 했다. 전염병 상황 전반에 대한 보도가 끝나면 사건사고 뉴스가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오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과연 군의 방역 대상이 전염병인지, 감염자인지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요즘입니다. 불합리를 지적하는 앵커의 멘트까지 흘러나오면 명헌은 라디오를 끄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
“학교는 아직까지 조용해서 다행 뿅.”
더 이상 실명자를 수용할 병원이 없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간만에 집합을 지시한 명헌의 앞에 도열한 아이들이 잔뜩 동요했다. 명헌은 침울한 얼굴들 앞에 가슴을 펴고 섰다. 앞으로 내 지도를 잘 따라 주길 바란다 뿅. 명헌은 4층을 완전 격리층으로 전환하는 것과, 기숙사 내 당번제를 논의했다. 의식주를 영위하기 위해 빨래, 청소, 식사 등 분야별로 일이 규칙적으로 수행되도록 역할을 나누자는 주장이었다. 전염병 이전의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체육관이 회의실이 되었다. 논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문제는 식사 당번이었다. 4층에 도시락을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하지 뿅. 명헌이 나섰다가 저지당했다. 형은 주장 일을 해야죠, 제가 할게요. 나서는 우성에게 현철이 한 마디 했다. 야, 우성이 넌 임마……. 미국에 가야지, 라는 말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다들 눈치챌 수 있었다. 낙수가 제안했다. 제비뽑기 할까? 재빨리 상황을 정리한 것은 성구였다. 그럼 난 부주장이니까, 반대할 사람 없지? 동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4층에는 아무도 계단으로 통행하지 못하도록 모든 계단에 차단봉이 설치되었다. 이후로 실명한 부원들은 운명을 받아들이듯 더듬더듬 4층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총 이십여 명이 하나둘씩 계단을 올랐다. 정해진 당번들끼리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하고 주변을 정돈하는 일은 그나마 안정을 주었으나, 아래층 인원이 줄어들수록 남은 부원들 사이의 긴장도가 올라갔다. 남은 것은 이십여 명이 채 못 되었다. 병의 그림자가 옥죄어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크고 작은 말다툼과 몸싸움이 점점 잦아졌다.
오늘도 싸움을 말리고 온 명헌은 달력에 파란색 펜으로 날짜를 긋고 지친 몸을 눕혔다. 어느덧 전염병 발생 50일차였다.
“이대로 전염병이 물러나는 걸까 뿅.”
한동안 4층으로 올라간 인원이 없었다. 명헌이 위층 침대에 누운 성구를 향해 말했다. 우리를 안타깝게 여겨서 여기서 멈추는 걸까. 성구의 침대가 삐걱였다.
“아니면, 그사이 우리한테 항체가 생겨서 이 느닷없는 병에 면역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일리 있다 뿅.”
물론 이대로 잠들었다 아침에 깨면 눈이 멀어 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 검은 손을 뻗쳤는지 모를 전염병이 암묵적으로 베푸는 유예기간은 은연중에 긴장을 내려놓게 했다. 명헌은 어쩐지 오늘밤은 무사할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 잠에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예감은 빗나가기 마련이라는 것을, 명헌은 잠에서 깨는 동시에 직감했다.
*
콰당탕!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명헌의 방과 같은 층에서, 먼 복도에서 나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천둥인 줄 알았던 것이 요란한 금속성 소음을 냈다. 정체는 모르지만 익숙했다. 마치 쇠파이프가 콘크리트 따위에 구르는 듯한―
쿵쿵쿵. 멀리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명헌이 일어나 앉았다. 성구가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주장, 도-도와줘! 살려줘!
아득한 외침에 명헌이 귀신 목소리라도 들은 듯 사색이 되었다. 성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김지형 아니야? 지형은 이틀 전 눈이 멀어 격리되었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쿵쿵. 쿵쿵쿵.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잠에서 깬 아이들로 복도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나가봐야 돼.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 명헌을 성구가 막았다.
“나가서 어쩌려고, 마주쳤다가 실명되면 가봤자 소용없어!”
“그럼 우리 층 애들 다 감염되게 놔둘까?”
거칠게 문이 열리고, 명헌이 복도 한가운데 섰다. 조명이 꺼진 복도, 푸름한 달빛 아래에 지형이 주저앉아 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벽을 더듬으며 기어온 듯 한쪽에 붙은 채로. 지형이 기어온 방향, 저 멀리 뒤편에는 동측 계단 동선을 막고 있던 차단봉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다. 성구가 뒤따라 나와 소리쳤다. 모두 들어가서 문 잠가, 절대로 열지 마! 성구의 목소리를 들은 지형이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절뚝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차박-차박, 차박-차박, 미색 테라조 바닥에 피 묻은 발자국이 찍혔다.
“야, 지형아, 잠깐만, 멈춰, 멈춰! 거기 서서 말해!”
차박. 지형이 멈췄다. 무슨 일이야 뿅. 명헌은 지형에게 물으며 그의 세 걸음 뒤에 위치한 방에서 조용히 문이 열리는 것을 곁눈질했다. 우성이었다. 이어서 같은 방인 동오가 고개를 내밀었다.
“주-주장, 날 좀 숨겨줘! 곧 애들이 들이닥칠 거야.”
“이쪽으로 넘어오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위층은 지옥이야. 한 녀석이 도시락을 도둑맞았다고 포크로 다른 애 팔뚝을 찔렀어. 그런데 밥을 제대로 못 먹은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싸움이 점점 커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됐어. 애들이 화가 나서 이리로 오고 있―”
우당탕- 쿵. 지형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동측 계단 위에서 사람이 굴러 떨어졌다. 흩어진 차단봉 앞에 쓰러졌던 인영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 피가 흘러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고함을 지르며 명헌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야, 주장 따위가 뭐라고! 순수한 증오였다. 명헌은 붙박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야, 피해! 동오가 팔을 뻗었고, 어느새 나타난 현철이 도움닫기를 했지만 성구가 한 발 빨랐다. 명헌에게 달려드는 부원을 온몸으로 튕겨냈다. 쓰러진 녀석은 움직임이 없었다.
“기절한 것 같다.”
“성구야, 괜찮냐?”
그 때였다. 우르릉, 머리 위가 울렸다. 지형의 경고대로 위층에서 여럿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낙수와 우성이 명헌을 최대한 복도 끝으로 잡아 끌었지만 몇 걸음 못 가 서측 차단봉에 닿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복도 반대편 끝, 광분한 십여 명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지 않는 탓에 양손으로 계단 난간과 허공을 더듬으며 방향을 잡은 이들은, 곧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구르며 뛰기 시작했다. 명헌이 칼칼한 목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먼저 말로 하자 뿅!”
그들은 시력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광분에 눈이 먼 상태였다. 다가오는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복도 길이는 약 사십 미터. 그사이 몇 개 방의 문이 열렸다. 부원 서넛이 용감하게 방에서 나와 합류했다. 그중 하나가 먼저 말했다. 어떡하지? 성구가 대꾸했다. 애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 현철이 받아쳤다. 그렇다고 얻어맞고만 있어? 동오가 외쳤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기절시키는 가스가 있으면 좋을 텐데! 우성이 물었다. 명헌이 형, 쿠폰 안 쓸 거예요? 명헌이 언성을 높였다. 쓰긴 뭘 쓰냐 뿅, 대신 죽기라도 하라고?! 낙수는 기가 찼다. 너흰 도대체 뭔 소리야? 생각이나 해!
명헌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쿠폰. 정우성. 세탁실. 이불? 연상작용처럼 명사들이 마구 떠올랐다. 쟤네, 어차피 앞이 안 보이잖아. 주먹으로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상황에 그러다 다치면 뼈도 못 추린다. 계단으로 유인하면 많이 다치겠지? 부원들이 이런저런 생각을 주고받는 와중, 명헌이 외쳤다. 섬유유연제!
“우성이랑 동오, 세탁실에서 섬유유연제 갖고 와라. 제일 큰 거.”
“아. 바닥에 뿌릴까요?”
“뿌려?”
“쟤네 대부분 맨발이야. 미끄러우면 넘어지겠지. 나머지는 이불이랑 수건 있는대로 갖고 온다 실시.”
“이불?”
“넘어지는 애들 제압하고 묶어.”
“명헌아, 접촉하면 위험하―”
“우린 어차피 눈이 멀게 돼 있어! 그래도 접촉하기 싫으면 빨리 방에 숨어라 뿅. 안 말릴 테니까.”
우성과 동오가 복도 중간에 있는 세탁실로 달렸다. 5리터짜리 섬유유연제 두 통이 복도에 가득 뿌려졌다. 장미향이 코가 아프도록 층 전체를 메웠다. 달리다가 미끄덩거리는 액체를 밟고, 만져본 이들에게서 광기가 가라앉고 대신 당황이 차올랐다. 이게 뭐야? 미끄러져 넘어지고, 구르고, 서로를 깔아뭉갠 아이들이 복도 반대편, 명헌과 무리들의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진이 다 빠진 채였다. 앞을 볼 수 없는 데다 굶주리고 다친 이들은 애초에 몸싸움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이들은 묵묵히 앞 못 보는 부원의 손을 묶고, 이름을 불러주고, 다친 곳을 닦아주었다. 명헌은 도시락을 제대로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모두를 4층으로 돌려보냈다. 사태가 마무리된 것은 새벽 다섯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먼동이 트고 있었지만 명헌은 잠에 들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이젠 정말로, 언제든 눈이 멀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처럼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공포스러운 것은 오늘 텅 빈 눈들 속에서 마주한, 폭력적이고 절망스러운 내면이었다.
*
이튿날부터 발병자가 몰아치듯 급속도로 늘었다.
주전 중 처음은 성구였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명헌은 아침부터 그가 불러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명헌아, 나 만지지 말고, 쳐다보지 말고, 빨리 나가. 명헌의 위 침대가 비었다. 다음은 동오였다. 한밤중에 우성이 명헌에게 달려왔다. 우성의 아래 침대가 비었다. 5번과 6번이 차례로 감염되니 인간은 부리나케 패턴을 찾았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이거 등번호 순서대로 가는 거 아니야? 농담이란 상황에 따라 허용치가 달라지게 마련이라, 그 농담 속 씨앗 수준에 불과하던 발상은 아이들 사이에서 불행한 생각의 줄기로 뻗어나갔다. 상징이자 자랑이던 숫자가 공포의 대상으로 둔갑했다. 그럼, 그 다음은 나인가? 자조하던 7번 현철은 집에서 격리 중이던 13번 현필의 소식에 한숨지었다. 의외로 다음 타자는 낙수였다. 이윽고 한 방을 쓰던 현철이 감염되었다. 주전 중 9번과 4번만이 남은 어느 저녁, 우성이 혼자 있는 명헌의 방에 찾아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명헌이 벌떡 일어났다.
“명헌이 형, 저 무서워요.”
“너 여기 오면 안 돼. 알잖아.”
“하루만 같이 자면 안 돼요?”
서로 가까이하면 안 되니 문 앞에서, 바닥에서 자겠다는 애원에 가까운 말이었다. 피차 이미 환자와 잔뜩 접촉한 상태니까 상관없지 않냐는 논리도 이어졌다. 명헌은 무거운 머리를 꾹꾹 누르다 허락을 내렸다. 가서 네 이불하고 베개 가져와 뿅, 해 뜨면 바로 나가는 거다. 점호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우성은 아홉 시가 되자 야무지게 불을 껐다. 정적이 깔린다. 한 명은 침대 위에, 한 명은 바닥에 누워 두 사람의 몸이 대략 T자를 이루는데 그 사이에는 다섯 걸음 정도 간격이 있었다. 양쪽이 한참을 뒤척인다.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명헌의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가늠하던 우성이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와요. 명헌은 한참 답이 없었다. 마침내 대꾸가 건너왔다. 라디오 들을래 뿅. 명헌은 우성을 고려해 평소 듣던 뉴스가 아닌 음악을 틀어주는 주파수를 찾았다. 치직, 치지직. 갈피를 잡지 못한 잡음이 이어지다 마침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성이 풉, 하고 웃는다.
“형, 클래식도 들어요?”
아니었지만 명헌은 부정하지 않았다. 클래식 비웃냐 뿅. 우성이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형이랑 어울려서요. 무서워하는 아기한테 자장가 뿅. 무슨 아기예요! 발끈하지만 그뿐이다. 이름모를 바이올린 협주곡이 끝나고, 심야 라디오답게 나긋나긋한 진행자의 목소리가 다음 곡을 소개했다. 이어서 들려드릴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D minor입니다. 초반부터 고조되어 몰아치는 듯하던 연주가 곧 차분한 선율이 되어 마음을 다독였다. 졸리네요. 우성이 소리내 하품하고, 곧 명헌도 하품을 했다. 이대로라면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평화로운 공기를 돌연 다급한 목소리가 갈라냈다.
[뉴스 속보입니다. 금일 오후 서울의 한 감염자 수용소에 외부인이 승합차를 몰고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방역당국과 경찰은 운전자 A씨와 차에 탑승한 공모자 6명을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취재에 따르면 A씨와 6인은 자발적으로 감염되고자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방역당국은 시민들이 감염자 및 보균자와의 접촉을 일체 금하도록―]
뚝. 라디오 전원을 끈 명헌이 천장을 보고 바르게 누웠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 깜깜한 2층 침대 바닥에 수용소와 트럭의 아수라장이 그려졌다. 수용소 철문을 뚫고, 자살특공대마냥 유리 현관을 들이받은 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들어가서, 충돌음을 듣고 공포에 질렸으나 앞이 보이지 않아 대책없이 우왕좌왕하는 감염자들 사이에 뛰어든다. 우연히 병실 한가운데 서 있는 환자의 손목을 낚아채 우악스럽게 품에 안는다. 혹은, 눈이 마주치면 병이 옮는다는 소문에 따라 초점 없는 눈을 뜨고 자신을 보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악다구니 쓰는 얼굴이 며칠 전 피칠갑을 하고 달려들던 부원의 얼굴로 둔갑한다. 명헌은 눈을 질끈 감는다. 풀벌레 소리조차 없는 밤, 심장이 쿵쾅쿵쾅 머리를 울린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스스로 눈이 멀고자 한 걸까. 심장이 쾅쾅 울리다 두통이 될 때쯤.
“명헌이 형.”
우성의 목소리가 명헌의 머릿속에 악몽처럼 계속되던 상상을 한 번에 흩어냈다.
“내일은 체육관에 가요, 오랜만에.”
오랜만, 이라는 말에 기억을 더듬으니 마지막 훈련이 나흘 전이었다. 성구가 격리된 뒤로 체육관에 갈 겨를이 없었다. 뿅. 짧게 대답한 명헌은 가슴 위로 두 손을 펼쳐 농구공 쥐는 시늉을 해 보았다. 손가락 끝마디에 감기는 공의 거칠거칠한 감촉을 떠올리면 퉁, 퉁, 퉁, 일정하게 마룻바닥을 때리는 파열음이 자연히 귀에 따라온다. 평생을 들어 온 소리가 천천히 심박을 낮추었다. 잠이 들려는 찰나, 차박차박 맨발이 장판을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명헌이 덮은 이불이 조심스레 걷히고, 낡은 매트리스 한쪽이 푹 꺼졌다. 같은 비누, 같은 섬유유연제, 같은 생활복. 그리고 부대낀 시간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가 좁은 침대 한쪽을 밀고 들어왔다.
우성, 가까이 오면 안 되는데.
말했잖아요, 저는 괜찮을 거라니까요.
모로 누운 우성의 가슴에 명헌의 팔이 닿았다. 쿵쿵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이 조금 전 자신의 것과 같아서 명헌은 무심결에 안도한다. 그런데 얘는 왜 이리 느려지질 않냐. 슬그머니 눈을 떠 곁에 누운 얼굴을 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 우성의 눈이 빛났다. 어쩐지 슬픈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반짝임을 기억에 담고 명헌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병증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명헌은 이대로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우성, 쿠폰 한 개만 쓰자 뿅.
다음날, 하얀 세계는 명헌에게 예언처럼 찾아왔다. 모두 사라진 찬란한 정적 사이로, 우성의 다급한 발소리만이 다가왔다.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