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으로 금일 송신을 마칩니다. 보급품 요청은 없습니다.
쉘터 4836. 보급품 요청 없음. 사흘 후에 북쪽으로 탐사 출발 예정. 송신기 상태 불량으로 금일 기점 최대 일주일까지 송신 불가할 수 있음. 낡은 송신기는 질 나쁜 소음이 곳곳에 눌어붙은 내용을 뱉어냈다. 찌릿한 소리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물비린내를 머금은 나무판자 탓이겠지만. 언뜻 들으면 인공지능의 조잡한 언어의 배열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후카츠는 기계라면 전혀 필요치 않을 것들을 송신하는 어느 구역의 생존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로봇과 기술과 돌연변이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존재와 본능만으로 같은 부류임을 입증해내는 인류의 특성 따위에 대해서. 아니면 불쑥 다가온 인류의 범우주적 소멸의 예외가 된 그와 자신이라든지.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지구를 향해 추락하는 소행성을 막기 위해 각국에서는 저마다의 로켓을 쏘아 올렸고 수많은 로켓의 폭격 이래 소행성은 순조롭게 파괴되었으나 지면을 향해 떨어지는 온갖 화학물질들을 걸러내지는 못했다. 삶의 터전을 부서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강력한 대응은 또 다른 멸망의 원인을 촉발하고야 말았다. 고려 대상에 없던 물질들로 인해 덩치와 지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지구상의 모든 변온동물들은 사이언스 픽션 소설에서 흔히 상상하던 그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기 시작했고, 세상은 그렇게 망했다. 아니. 정확히는 인류가.
갑작스러운 멸망의 전조와 이유는 이러하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동물들의 손짓 하나에 무너지고 부서졌다. 그들 체급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한 인류는 무자비하게 죽어갔고 남은 자들은 재빠르게 땅 위에 머물러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났다. 땅 밑 깊은 지하로. 그런 반강제적 은둔 생활의 시간이 오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자보다 생존자를 집계하는 것이 더 수월하게 됐을 때부터는 통계상의 결과 또한 의미를 잃었다. 삶은 당연한 전제가 아니라 특수한 상태가 되었고, 후카츠 카즈나리는 그런 특수성의 연속 속에서 칠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형식적인 송신 후에 이번엔 송신을 보낼 준비를 했다. 번잡한 방해 요소의 발원지를 추적하면 기필코 이곳이리라. 때 탄 다이얼을 몇 번 굴리면 낡은 송신기는 죽음을 목전에 앞둔 자의 비명처럼 형용할 수 없는 잡음을 울려댔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두어 번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송신이 터져 나왔다.
”캇상!”
후카츠는 다소 투박하게 생긴 부분을 전보다 더 비밀스럽게 귀에 가져다 댔다. 자세를 고쳐 앉느라 녹슨 의자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통신실이라는 명목하에 대화를 훔쳐 들을 자라곤 일절 없었으나 늦은 밤의 랑데부라도 되는 양. 세계가 서로에게만 국한되듯이.
잘 지냈니. 무슨 일은 없고. 그러니 애인에게 안부를 물을 때마다 단단한 이마가 잘게 뭉그러지는 것을 그는 영영 모를 것이다. 칠 년 동안 살아 남으면서 갈고 닦는 날카로운 감각이 사랑하는 자의 앞에 무용해진다는 것 또한 그는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현존하는 쉘터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노후된 곳에 머무르는 후카츠에겐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거울이나 다정하게 변화에 대해서 알려줄 사람은 없었으며 그런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또한 없었으므로.
그러나 이 순간 속 버석하게 갈라지는 기계음 또한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날리는 전파 너머의 또 다른 생존자.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
”저야 늘 잘 지내죠.”
사와키타 에이지. 현재는 비로소 그 골자로 이루어진다.
인류의 멸망이 도래한 지 칠 년. 사와키타와 교제한 지는 그보다 일 년 더. 사랑은 의미 없는 무용담에 불과하다는 제 말을 당차게 무효화시키며 등장한 사람답게 사와키타는 저에게 사랑받으려 태어난 사람처럼 여린 부분을 맞대왔다. 회고하건대 그 순간이 바로 제 운명을 눈으로 봤던 순간이라고. 숙명은 사와키타 에이지의 이름을 갖고 저에게 날아왔다고.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머리부터 아롱아롱 들이미는 삶의 본위를,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자신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고해를 들을 자 또한 저 자신이었지만.
”캇상은요? 거기도 무슨 일 없죠?”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기죽지 않고 제 안부를 되물어왔다. 사와키타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이곳보단 환경이 좋을 것이다. 손에 감긴 투박하고 거친 감각을 느끼며 제 것보다 월등히 괜찮은 것을 쥐고 있을 연인을 생각했다. 수줍은 마음으로 초조하게 칠 년 내내 이 순간마다 선을 손가락에 배배 꼬고 있을 사랑에 대해 상상하면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없지. 있으면 연락은 못 할 꼴일 테고.”
동시에 벽면에 붙은 지도를 바라봤다.
”그보다 연락하는 쉘터가 한 곳 있어. 북쪽으로 올라간다 했으니 곧 네 쪽과 만나지 않을까 싶은데.”
짐작하기로 며칠 뒤 북상할 그는 저와 사와키타 사이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시선으로 부단히 지도의 표면을 쫓았다. 새로운 곳을 개척하러 가는 상황에 보급품 요청이 없다는 것은 거점을 옮긴다는 걸 의미할 터였다. 땅 위의 찬란한 문명을 포기하고 척박한 흙더미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던 몇 년 전의 인류처럼 온 시간을 묻고 새로이 삶을 찾으러 갈 어떤 생명. 삶. 사람. 그렇다면 서로의 정체도 모른 채로 교신하던 자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연인에게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묻혀 있을까. 꾸준히 생존을 도모하는 그를 매개로 지면에 불시착해 떨어져 나온 시간의 잔해에 대해서 생각했다. 멸망이 비가 되어 내리던 그날처럼.
거리와 빈도는 인간의 마음을 통제한다. 만남의 부재는 서글픈 마음을 남기지 않고 파훼하는가 하면 날뛰는 마음에 강력한 날개를 달아주기도 했다.
”후카츠 상.”
그중 사와키타는 재자면 후자에 가까웠다. 보지 않으니 애달팠고 애달파서 괴로웠으니 사와키타가 곁에 존재치 않아서 그런 것인지, 온통 주변이 그의 생각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 점차 확실해지던 것은.
”그건 그렇고 오늘 우리, 만난 지 딱 팔 년 되는 날인데······.”
그는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사랑한 시절 그대로였다. 말끝을 있는 힘껏 길게 늘리는 고백 또한 마찬가지로. 어렴풋이 꿈꾸고 수도없이 상상해봤던 그는 여전히 사랑해야만 했던 무렵에 살고 있었다. 고로 불가항력이었다. 볼 수 없는 채로 그의 생각을 해서 괴로워지는 것이.
”······그런 것도 세니.”
”기념하면 좋잖아요.”
그리고, 이런 시대에 대단히 기억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나한테는 이제 캇상이 북극성이죠. 사와키타는 어린 아이가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조용히 속삭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라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곁에 있지 않음에도 살살 흘러나오는 숨결을 느꼈다.
”보고 싶어요. 항상.”
그러니까, 후카츠 카즈나리는 권태로웠다.
이 고리타분한 멸망과 칠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생활이. 사랑하는 사람을 저 멀리 두어야 하는 세계가. 로봇이 판치는 세상에 아날로그 기계에 매달려 전해야 하는 마음이. 전구 하나에 의존해야 하는 통신실과 바랜 송신기, 변색된 지도와 녹슨 못, 갈라진 판자 두어 개는 최고의 촉매가 됐다. 그리고 단념한다. 사와키타. 사랑하는 네가 나에게 새로운 선택을 고르도록 만드는구나. 비겁하게 그 애의 이름을 빌려도 어디까지나 제 몫임을 알고 있다. 벙찐 입술이 말라가는 찰나가 적나라하게 다가왔다.
정해진 규칙처럼 전해오는 연인의 언어가 오늘따라 유독 버거운 따름으로는 소수의 생존자들에게 떠넘겨진 모든 인류의 울적함과 원색적인 마음의 폭로 때문이리라. 대답을 해야 했는데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녀석은 전선 너머의 곳이 메말라 가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불안해 하고 말 거고.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일이 흘러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후카츠는 하나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사와키타.”
만나자. 아키타에서.
아키타 논스탑 러브
”캇상. 혹시 미친 건 아니죠?”
”연인한테 만나자고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할 일인가?”
캇상! 짧게 들려오는 제 이름 뒤에 원망이 담겨 있었다. 연장자에게 대드는 모습이 고까웠으나 부러 말을 골랐다. 신경 쓰지 않으려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아키타까진 도보로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다. 결정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출발해야 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벌써부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제 이름을 불렀을 모습이 상상됐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팔자 좋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 애가 머무르는 곳에서도 저처럼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으나 이 모든 건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이자 모방일 뿐이었다. 어설픈 현재는 사랑을 묘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관망은 더 이상 사양이었다.
서로를 상상하는 것이 전부인 이 세상에서 후카츠는 사와키타의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어렸고 나쁘게 말하자면 피곤했다. 코트 위에서 모든 요소를 이용할 수 있었던 비범한 두뇌회전으로 사와키타는 인내를 고난으로, 소망을 희생으로, 그래서 보고 싶어 한 것들을 제가 어린 탓에 사랑이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이 눈에 훤했으니까. 전력으로 살아내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걔는 엇나간 방향으로도 전력으로 나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런 마음을 품게 되면 사고의 방향을 옳게 바꿔 줄 이가 없었다. 그 자리는 오직 저였으므로.
”아키타는 네가 훨씬 가까워.”
”······.”
”굳이 위험한 쪽을 꼽자면 내 쪽이겠지.”
도박을 예고하는 말투치곤 과하게 차분했다. 동요하지 않는 것은 이제 제법 속성에 가까워졌다. 멸망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 사랑을 살리기 위해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여태까지의 생존에 있어 이점을 봤던 것만은 분명했다.
”캇상답지가 않잖아요. 이런 건.”
”······.”
”취소해요. 그냥 말실수였다고 해요. 얼른.”
사와키타. 그리하여 비로소 칠 년을 살게 만들었던 이의 이름을 불렀다.
”난 옛날의 내가 아냐.”
그리고 칠 년은 무척 긴 시간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낮은 탁성이 전선을 타고 흘러간다. 말수가 점점 줄어드매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나도 대단히 네 생각을 하니까. 변수의 연속은 권태롭고 확실한 무언가를 얻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더욱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뿅.”
”후카츠 상.”
”안 죽어. 절대.”
오롯이 사와키타 에이지라서 가능했던 일들. 그 최고를 갱신할 오늘.
구 일 뒤 아키타. 산왕에서 만나. 약속한 거야. 이제 사와키타는 저의 전언을 기억하며 아키타로 향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으로 불만을 표출해도 사와키타는 결국 자신의 언어를 좇을 것이다. 그래서 후카츠는 사와키타를 일갈하는 대신 딴에 마지막 반항처럼 사용했을 앙다문 입술을 떠올렸다. 상상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내 생각에만 담지 않을 테니까.
이제 송신 보내지 마. 보내도 못 받을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송신을 끊었다.
*
”값싸게 죽겠다는 것밖에 안 돼. 네 계획.”
스즈키가 술잔을 건넸다. 들으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문이 열려 있어서. 덧붙이는 변명은 마치 그녀가 불합리한 행위라도 범한 것처럼 들리게 했다. 실상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 뿐인데도. 내심 그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스즈키 쿄카. 그리고 야마토 류지. 함께 쉘터 생활을 한 지는 오 년 가까이 되었다. 돌연변이 개미의 습격으로부터 오 년 정도가 지났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때부터 이곳을 지탱해온 최후의 생존자들이라는 뜻이 되기도 했다.
오 년 전의 어느 날을 복기한다. 만신창이가 된 쉘터 속에 맴도는 피비린내와 눈물의 냄새에 서로의 불행을 귀의하던 어렸던 셋의 하루들. 그 후로 나날이 늘어가는 생채기는 생존을 향한 치열한 투지를 증명해주는 표식이 되었다. 고로 의문스러웠다. 죽으려는 생각 따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노출되는 모든 부위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처들은 생존의 암묵적인 약속이 아니었나. 일차원의 수직선처럼 너무 차분한 인생을 살아 온 후카츠에게 죽음은 처음 발견된 진리처럼 생소했다. 하다못해 멸망 속에서도. 그보다 그에게 있어 놀라운 것은.
”막진 않아?”
”안 막아.”
”왜?”
순수하게 궁금했다. 가장 뜨거운 시기를 바쳐 사랑한 연인도 만류한 것을 그녀는 왜 바로 순응하는지. 술에 취하거나 취하지 않고서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론처럼 들먹이던 그녀가 왜 지금의 변화 따위는 쉽게 수용하는지.
”말려도 안 들을 테니까.”
사랑은 원래 불가능을 가능케 하지. 알다시피 내가 또 사랑불신론자는 아니라서. 대답은 명쾌했다.
”직접 보러 가야 할 만큼 절실한가······.”
”질문 뿅?”
”궁금해서.”
스즈키가 준비한 반문을 느긋이 펼쳐냈다. 보러 가지 않아도 사랑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뿐더러 살아 있어야 사랑이 되는 건데 왜 굳이 목숨을 내건 연애를 해야 하냐는 거야. 그녀는 시선 끝에 여전히 후카츠를 둔 채로 애먼 술잔만 홀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명확한 답을 들으려는 모양이었다. 저가 한 번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버릇. 달성할 때까지 목적을 저버리지 않는 속성. 분명 저에게도 저런 속성을 가진 자가 곁에 있던 적이 있었다.
”원래 모든 사랑은 절실하지.”
고심하다 내놓은 답변은, 뭐, 어떻게 마음에 들었니······. 받아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피부를 활활 태우는 듯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폐부 온 부위로 퍼져 나가면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몇 달 전 탐사에서 힘겹게 얻어 온 것이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운명을 함께 느끼게 되는 순간의 기분으로 술병의 입구를 땄을 그녀의 기분으로 생각했다. 삶의 극한을 함께 한 자가 떠난다니 내심 속상하겠고, 그래서 이해할 것이다. 스즈키 쿄카는. 어쩌면 질문하기 한참 전부터. 그렇다면 지금의 반문은 이제 그녀에게 믿음이 된다.
”받아. 지도 여유분 만들어 뒀던 거.”
스즈키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지도를 던졌다. 건네 받은 지도에는 함께 구르고 뒹굴며 얻어 낸 칠 년의 결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후카츠가 나아가야 할 길까지도. 스즈키의 기록에도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순례길을 점지해주는 신의 마음으로 이 선들을 이어 붙였을까. 이 거대한 마음을 다른 류의 사랑이라 총칭해도 좋을 것이다. 언제부터 자신의 주변에 이렇게나 사랑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농담처럼 내던진 사랑불신론자 단어 하나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과거의 저를 대변하는 자음과 모음의 규칙적 배열. 쉴 틈 없이 벅찬 글자의 나열.
권태로워야만 비로소 권태를 깨 부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다. 불온한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불온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멸망한 세상에서도 배울 것은 여전히 있었다.
”출발은 언제?”
”해 뜨면.”
”야마토한테 인사하고 가. 서운해할 걸.”
후카츠가 잠시 망설였다. 마른 입술이 몇 번 꾸물대다 답을 놓았다.
”네가 대신 전해 줘.”
”왜?”
”역시 사랑이 가장 강력한 방패니까.”
아하. 그래서 애인인 내가 대신 전하라. 네 당돌한 이단아 선언을? 가당찮은 소리를 한다는 듯이 스즈키가 어깨를 들썩였다. 직선의 어깨가 흔들리면 그 위를 간신히 지나는 머리칼이 살랑살랑 요동쳤다.
”못 할 짓인가 뿅?”
”여전히 못 할 짓이지.”
술잔이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즈키. 약속한 이름이 낯설다.
”사랑은 멀어질수록 절실해지잖아.”
”······.”
”그러니 네가 져 줘야 돼.”
못내 그녀가 져 줄 것마저 없었다. 각기 다른 사랑 앞에 승리는 명백해지므로.
언어로 빚어내지 않아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형체를 갖지 않고서야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고로 후카츠는 이 순간에 일련의 첨언을 담지 않기로 했다. 술잔을 건네 줬던 손에 빈 잔을 쥐어줬다. 행동은 언어의 훌륭한 표방이 된다. 저항 없는 모습은 터무니 없는 계획의 허가를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방을 떠나며 남기고 간 작별인사를 되뇌이며 후카츠는 마지막으로 쉘터 4836의 어느 생존자를 생각했다.
”하나 말하고픈 건 난 진심으로 네가 성공하길 바란다는 거야. 전우로서······.”
곧 시작될 긴 여정 속에서도 다정한 그 말의 떨림을 오래도록 짓씹어야만 할 것 같았다.
*
그로부터 오 일이 지났다.
바야흐로 강력한 침묵의 계절이다. 녹이 슬듯 겹겹이 스며든 온갖 멸망의 흔적들이 눈에 새하얗게 덮인 세계가 유독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재앙의 폐단을 한껏 끌어안은 어떤 계절의 신호는 어느 한 이단아의 턱을 덜덜 떨리게 했고 생채기 잔뜩 새겨진 두 손발을 꽝꽝 얼렸으며 자꾸만 찬 숨을 들이마시게 만들었다. 뺨을 거세게 할퀴는 영하의 바람은 온갖 매체를 장식하던 행성 극단의 오로라를 품은 땅을 향한 찬사를 상기시켰다. 지겹게 몸을 기어오르는 추위라는 것은 어쩜 이리도 지독한지. 폭설이 만연하던 곳에서 살던 자취도 거대한 순환의 질서 앞에선 자꾸만 맥을 못 추리고 고꾸라졌다. 몸은 기억을 잃고 쏜살같이 배어든 추위에 길을 오래 헤맸다.
악독한 계절은 양날의 검이 됐다. 발끝이 잘려 나가고 손끝에서의 감각을 앗아가는 추위는 겁없는 이단아의 몸과 마음을 천천히 잡아 먹는 반면 급변적 돌연변이들의 예민한 본능을 잠재우기에도 충분했다. 여태 지나 왔던 길에는 어느 여름날 이루어졌을 괴팍한 난동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기억에 담겨 있는 괴수의 모습은 목격할 일은 없었다. 덕분에 긴 날들이 예고되어 있는 여정에서 험난한 상대는 여전히 제 뒷꽁무니를 좇는 추위 뿐이었다.
후카츠는 그 속에서도 부지런히 걸었다. 발이 얼어붙어도 끈질기게 다시 한 걸음을 뗐다. 발바닥과 눈에 짓무른 땅이 맞붙을 때마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으나 어떠헌 머뭇거림도 없이 다시 여정을 해 나갔다. 두 손이 목석처럼 얼어붙어 지도를 쥐고 나아가는 게 불가능해지면 도중에 멈춰 서서 길을 외워 가며 움직였다. 고통으로 인해 감각이 둔화되면 그에 상응하도록 목적은 더 뚜렷하게 제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추위를 같이 겪어내고 있을 연인이 머무를 지역에 대해 생각하며 삶의 일부분이 찢어지는 감각을 고이 삼켜내었다. 관둘 수 없었다. 관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모조리 관두며 출발한 여정이었다. 후카츠는 추위에 거침없이 잘려나가는 모든 고통의 부위에서 금방 새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스스로를 애써 자위하며 물에 질퍽하게 젖은 흙을 연신 밟아내었다.
그때 불행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용히, 바스락거리며.
물을 머금은 흙은 금방 얼었다. 덕분에 후카츠는 제 딱딱한 몸과 맞부딪쳐 끔찍한 소리를 내는 현장에 온 신경을 내던져야만 했다. 검게 덮인 시야와, 풋풋하고 비린 흙 냄새와, 반사적으로 목을 긁어 나온 앓음의 소리와, 손톱 밑을 순식간에 파고드는 진흙. 그리고 혀 끝을 아리게 때리는 씁쓸한 맛. 입에 담긴 것을 거칠게 뱉었다. 얼얼한 통각 반응이 멍해진 뇌를 깨웠다. 밖으로 뱉어진 것은 비단 흙과 작은 돌 조각 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판단 또한 담겨 있었다. 무언가 엎어졌으리라 하고. 또 잘못되었다 하고. 그리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깨달은 순간의 불가항력에 대한 탄식이었다.
떨어진 곳은 개미굴이었다. 사방을 두르고 있는 통로의 개수만큼 공포가 엄습해 왔다. 후카츠는 의식적으로 떨리는 눈꺼풀 아래와 입술을 거세게 악물었다. 본능적인 생각에 관절이 절로 덜걱거렸다. 막연하게나마 상상했던 일. 죽음을 향한 인간의 본능을 어렴풋이 가늠해온 일보다도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닳을대로 닳은 손으로 굳은 흙덩어리를 움켜쥐고 또 다시 방도를 찾았다. 어린 청춘 무렵의 습관이 질기게도 이어졌다. 빠른 속도로 가능성을 계산하는 일. 같은 색의 유니폼을 입고 코트 위에서 버릇처럼 수행했던 일. 마치 현재가 그 순간의 연장선처럼 이어졌다.
개미굴은 오고 가는 통로의 개수에 비해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잘하면 기어오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오른쪽 발목이 찡하게 울렸으나 얼어붙은 탓에 제대로 느껴지지 않음을 안도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성한 자세가 자꾸만 통증을 일깨웠다. 살아야 한다는 위기감에 뇌는 되려 팽팽하게 돌기 시작했다. 인류에 필적하는 지능. 돌연변이. 죽음. 계략적인. 행위. 행동. 인간같이.......
에이지. 급해지는 마음 속에서 사랑하는 자의 이름을 기도처럼 읊었다. 이 모든 버둥거림과 고통에 대항하는 숙명의 낯을 수면 위로 퍼올려냈다.
그러나 희망의 붕괴는 아주 완벽한 순간을 노리고 들어오는 법.
굴 안 쪽에서 동물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얼마나 방대하게 지어진 것인지 온 구멍에서 같은 소리가 송송 울려와 골을 세차게 때렸다. 생존을 향한 모든 시도를 가로막는 강한 울음이 저를 순식간에 집어 삼키고는 당최 놓아주질 않았다. 자꾸만 구부러지는 무릎을 붙잡고 엉성하게나마 자세를 유지했다. 극한에 몰릴 수록 환부에 힘이 실렸다. 침착하자. 일단 수많은 가능성의 구멍 중에서 어디로 튀어나올 지를 계산해야 했다. 아니,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오 년 전 삼십을 거뜬히 넘어가던 쉘터 구성원들을 가뿐히 먹어치웠던 그때 그 형상이 바로 제 등 뒤에 있음을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전선 너머 사와키타의 달뜬 숨결을 느낀 것처럼 등판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와 본능의 울음이 느껴졌다. 자신은 포식자의 보금자리에 기어들어 온 먹잇감이나 죽음을 자초하는 미친 생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기어코 엉거주춤 유지하던 자세가 무너졌다. 절망은 눅눅하고 끈적해서 쉽게 떨쳐낼 수 없었던 것임을 잊은 패착이리라. 오 년의 플래시백이 선연히 펼쳐졌다. 기울어진 시야에 높게 치켜든 녀석의 입이 보였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형체 모를 것이 뻐근하게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공포나 죽음에 대한 산물 따위는 아니었다. 굳이 명명하자면.
”······사와키타.”
하나 사랑에 대한 걱정이었다. 저를 생각하며 멸망의 한가운데로 나아갈 연인에 대한 염려. 홀로 남겨지면 어쩌지. 너는.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지그시 눈이 감겼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 캠핑카 안이었다.
직전까지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자신을 덮고 있는 담요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으며, 쉘터에서부터 개미굴에 빠지기 전까지 꾸준히 씹어 댄 통조림의 냄새가 코 끝을 가련히 간지럽혔다. 분명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는데.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면 끝내 단발의 총성을 들었던 것도 같다. 안도감과 불안이 동시에 휘몰아쳐 턱관절이 반사적으로 떨렸다. 날갯죽지가 얼얼했다. 쉽게 빠지지 않을 것처럼 콱 박힌 추위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제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자체로도 버거운 상황 인지도 끝마치기 전에 녹슨 경첩 두 짝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당장 제 것이 아닌 천을 힘껏 쥐었다. 목을 넘어가는 침의 흐름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이곳저곳 부식된 문 뒤로 한 남자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윽고 마주치는 삭막한 눈에서는 어떠한 악의 같은 것이 아니라, 되려 같은 처지의 생존자을 향한 연민 따위의 것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축축한 동정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세게 쥔 손에서 혈관을 질주하는 박동이 느껴졌다. 그새 또 상처가 늘었다. 패인 손톱자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생명의 의지가 느껴졌다.
”엔도 소라입니다. 편히 엔도라고 부르세요.”
고단한 행색의 남자가 저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깔끔한 머리카락과 눈가에 깔린 짙은 다크서클을 지나면 그제서야 제 발목을 휘감는 붕대가 보였다.
”······후카츠 카즈나리입니다.”
선의를 의심한 마음이 금세 부끄러워졌다. 그것을 앞에 선 남자가 알 리는 만무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난히 말을 걸어 왔다. 아무래도 같은 생존자를 마주한 것이 내심 반가운 모양이었다.
”개미굴에 빠져 계셨던데.”
”예.”
”유명합니다. 이 일대에선. 그쪽 길은 거의 사용을 안 하기도 하고요.”
뇌내로 입력되는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 몇 분 전에 통성명을 한 자로서는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혹시 쉘터 4836에서 오셨습니까?”
”금방 아시네요. 이건 살아남은 자의 소양인 겁니까?”
잦게 생각했던 어느 생존자. 출발할 때 즈음에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저와 사와키타 사이에 머물렀을 사람. 속으로 짐작하기를 아마 저를 죽음의 목전에서 현실로 돌려놓은 것도 눈앞의 그일 것이다.
”나는 당신을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보낸 송신에 답은 안 돌아오는데, 발견한 사람은 추위에 오래도록 시달린 것 같아 보이는 게 당신이겠다 싶었습니다.”
아마 나처럼 목적지를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겠죠. 남자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부러 나른하게 구는 모습에서 울적한 기운이 풍겼다. 남자 또한 모든 생존자가 떠넘겨 받았을 무력감과 우울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끔찍할 정도로 우울하고 차분해서 한때 인공지능의 농간으로 의심하기까지 했던 그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인간의 것이었다. 꽤 오래 품었던 찰나의 의심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혹시 시간이 어떻게······.”
”이 재난 속에 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하하. 괜히 짓궂게 말해본 겁니다. 쓰러져 있는 당신을 데려온 지는 이제 사흘 째고요. 남자가 담배를 꼬나물며 커튼 사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갈랐다. 겉으로 빠져 나오는 숨의 무게가 무겁다. 밖의 상황을 대략 가늠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주변의 공기가 금세 탁해졌고 오랜 추위에 시달리며 얻은 꺼끌거림이 다시 되살아났다. 호흡이 다시 불편해졌다. 기침은 이제 익숙해진 지경이었다.
”곧 해가 뜰 겁니다. 슬슬 준비하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아키타로 가는 길을 압니다. 지름길이라고 하던가요······.”
남자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시선 끝에는 축축하게 젖어 번진 것이 갈가리 찢기기까지 했다. 사랑 가득 어린 기록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이리저리 형형색색으로 뒤섞여 있었다. 다시 붙이려는 의지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마음 속에서 꺾이는 소리가 났다. 지도가 없으면 나아갈 수 없다. 마지막 확인에 빗대어 꽤 가까운 곳까지 오긴 했으나 앞으로의 거리가 불명일 뿐더러 옮겨진 이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혼자 가겠다 하면 난 막진 않을 생각입니다.”
남자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후카츠가 제 손을 들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고를 수밖에 없는 선택지와 고를 수 없는 선택지를 두고 진행하는 밸런스 게임은 그 어느 문제보다도 간단하다. 정답 또한 명확할 테니 말이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우린 나아가야 하니까요. 남자가 덧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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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그 후로 묵묵부답이었다.
후카츠 쪽에서도 따로 말을 걸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묵념의 동행이었다. 사흘 동안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은 모양인지 나아가는 곳엔 축축한 냄새만 남아 있을 뿐 새하얀 기운은 모조리 소멸한 듯 보였다. 가끔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소량이 남아 있었으나 여태 건너 온 닷새를 생각하면 이렇게 수월한 여정이 없었다. 꽁꽁 얼어붙어 고난의 길이 되었던 것이 지금은 푹신한 서글픔의 길이 되어 있었다.
”아키타엔 왜 가는 겁니까?”
해가 뜰 무렵에 걷기 시작했으니 대충 다섯 시간 쯤 걸었을까. 질문은 아무 전조 없이 들이닥쳤다. 음산한 산길을 두 번 빠져 나오고 다시 들어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다정 어린 손길에 빠른 페이스로 회복하기 시작한 발목이 슬슬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가족?”
”아뇨.”
그러면 그만큼 필사적으로 봐야 할 사람이겠군요. 남자의 어투는 하염없이 차분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봤을 때는 울적하고 서글프기까지 한 것 같았다. 이해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는 것은 문장을 네 번 정도 더 곱씹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대단하신가 봅니다. 당신을 움직이게 만든 걸 보면요.”
”······가족이라 하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불문하세요. 목숨을 내걸었는데 알량한 근거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의 속도를 조금씩 올릴 뿐이었다.
후카츠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마른 입술에 힘을 실고 마음에 집중했다. 그래. 후카츠 카즈나리에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목숨을 내건 게임이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게 만드는 자. 절대자에게 귀의하며 운명에 삶을 복종시켰던 고대의 재앙 속 사람들처럼 제 삶 전부를 종속하고 싶게 만드는 자. 뿌리내린 지반 자체를 흔들어 주체도 못한 채 휩쓸리게 만들었던 재난의 형상. 이단아와 이교도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게 폭력적으로 세계를 쓸어 간, 오로지 후카츠 카즈나리만을 위해 탄생한 만인지상의 사랑이.
여즉 저에게 순종적인 사와키타가 이변처럼 타박해야만 했던 이유를 깨닫는다. 순식간에 몰아치는 변화에 가냘픈 마음으로 안락한 곳을 떠나게 되었을 사와키타를 생각했다. 저와 스즈키가 작별인사를 나눈 것처럼 그의 쉘터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을 사와키타를 떠올렸다. 그렇게 멸망의 잔해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고 변수에 대응하며, 마치 코트 위의 에이스처럼 새하얀 대륙을 누빌 천사의 모습을 갖췄을 사와키타를 상상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닫는다. 비로소 극한의 폭력적인 가변성이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음을.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최후의 변수가 되었구나 하고······.
”여기서 헤어집시다.”
당도한 곳은 갈림길이었다. 또 다시 작별의 시간이 왔다.
”그쪽으로 쭉 가면 산왕공고입니다. 난 이쪽으로 가야해서.”
”잠깐, 그걸 어떻게,”
”당신 지도. 구해왔다면 봤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건 원래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건데······ 내가 깨나 농구를 좋아했어서. 지금이야 변변찮은 치료나 하고 다니지만 나도 중학교 때 부상 전까지는 어느 정도 이름 날렸던 적도 있고. 목소리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얼굴을 보니 알겠더군요. 만나러 가는 자가 학교 동문인 듯해서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언급하는 게 뭐, 의미가 있나 싶다만은. 기억하는 자가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세기말 황혼의 중심에 서 있었잖아요. 당신은. 이미 저문 꿈일지라도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대명사를 다시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꽤 오래 지났는데도 여전히 어린 티가 나는 게 조금 의외였군요. 잇따른 남자의 고백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위에 다물린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이 계졀에 낙엽 있으면 개미굴이니 조심하시고요.”
”······엔도 씨는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하코다테로 갑니다.”
남겨진 사람들끼리 모여 새로 쉘터를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히 쓸모는 있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돛대를 비벼 껐다. 여전히 고단한 행색이었으나 죽은 상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희망의 불빛으로. 목숨을 구해 준 것을 넘어 온몸을 휘감는 경외감에 후카츠가 뻐근한 허리를 접어 예를 차리는 것은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는 무슨······.”
당신을 구하기로 한 건 오로지 나의 결정이었거든요. 이 시대에 사람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정 하고 싶다면 어디선가 살아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대신하죠. 다시 봐야 하니 부상 조심하시고.
남자는 그렇게 떠났다. 후카츠는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곱씹어야 할 다정의 떨림이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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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후카츠는 또 걸었다. 아니, 걷다 못해 뜀박질을 시작했다.
여전히 계절은 죽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들은 모조리 할퀴어 버리는 바람은 매서웠으며 코 끝은 시리다 못해 욱신거리고 저려왔다. 온갖 난동과 발악의 흔적이 깃든 지형은 걸음 하나 내딛는 것도 버거웠고 손상된 환부는 유독 추위에 약해 난항을 겪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