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EXT. 야간 개장 놀이공원 - 밤
남1과 여1이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다.
머리에 미키마우스 머리띠가 씌워져 있는 둘.
매직스윙과 허리케인을 지나면 불이꺼진 회전목마가 우뚝 서 있다.
여자1
(천천히 걸으며)
밤에 보는 놀이공원도 참 예쁘네.
남1
응.
주변을 거닐던 남1과 여1은 회전목마 앞에 멈춰 선다.
여1
(회전목마를 바라보며)
여기 회전목마는 불이 꺼져 있네?
남1은 여1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귀를 만지작거린다.
긴장한 듯 얼굴 표정이 굳어있는 남1.
남1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은영아.
은영
응?
남1
(침을 꿀꺽 삼키며)
네가 없는 내 인생은 마치 이 불이 꺼진 회전 목마 같았어.
은영
......
남1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네게 도달할 수 없었고, 난 계속 같은 자리에 남겨져 있었던 거지.
남1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반지케이스다.
남1
하지만 너와 함께 한다면 불이 꺼진 회전목마에서 같은 자리에만 서있어도, 영원히 즐겁고 행복할 거야.
은영은 감동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
남자, 그런 은영을 바라보며 반지 케이스를 연다. 희미하게 발광하는 반지 한 쌍.
아이돌 닮은 잘생긴 20대 남자(정우성), 수풀 뒤에 숨어 무선 송신기에 대고 말한다.
우성
오케이. 여기서 감정을 담아 부릅니다. 은영아.
남1
은영아.
우성
존재해줘서 고마워
남1
존재해줘서 고마워
우성
이제 나랑 인생이라는 회전목마를 함께 타지 않을래?
남1
이제 나랑 인생이라는 회전목마를 함께 타지 않을래?
배우 닮은 잘생긴 20대 남자(최동오)가 미리 돈으로 섭외해 놓은 놀이공원 직원에게 사인을 내린다.
동오
조명, 큐!
회전목마에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노랫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움직이는 회전목마.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환호성이 들린다. 유도하는 정성구와 김낙수.
낙수
(일부러 환호성을 지르며)
와아 받아줘! 받아줘!
성구
둘이 잘 어울린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은영, 반지를 건네 받았다.
이윽고 포옹하는 남1과 은영.
그 뒤로 화려한 폭죽이 터지며 밤하늘을 장식한다.
현철(20대, 단장)
(소형 마이크에 대고)
오케이! 오늘도 수고했다.
#2 INT. 산왕 연애 조작단 사무실 - 오후
지하 연습실을 개조해 만든 사무실.
한 면엔 통유리가 붙어 있고 맞은편엔 칸막이로 공간을 구분해둔 사무 공간이 있다. 잿빛 벽에는 찰리 채플린, 스타니슬랍스키, 잭 니콜슨 등의 사진이 붙어 있고 구석에 서 있는 커다란 흰 칠판에는 XXX 의뢰인 멘트 연구할 것!, XXX 의뢰인 프로젝트 살수기 반납, XXX 의뢰인 타깃 4차 시도 완료 등의 문구가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재무회계표를 보고 인상을 쓰는 덩치 큰 신현철, 칠판을 보며 일정을 체크하는 키 큰 정성구, 낡은 소파에 앉아 종이를 들여다보며 동선을 짜는 김낙수와 최동오를 비춘다. 마지막으로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걸레로 마루를 닦는 정우성 Full shot.
현철
(손가락 사이로 펜대를 돌리며)
이번 달은 좀 빠듯하네.
성구
(칠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우리가 최근에 너무 많은 인력이랑 돈을 몰빵해서 그래.
낙수
짠돌이 새끼. 우리가 놀이공원까지 섭외했으면 추가금을 더 내야지, 입 싹 닫는 거 보면 걔도 왜 늦게까지 연애 못했는지 알겠더라.
동오
이번 달은 좀더 부지런해지지 뭐. 어차피 봄이라서 성수기잖아.
우성, 이젠 대걸레를 마이크처럼 쥐며 노래를 흥얼거려댄다.
낙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 새끼는 속도 편해요.
동오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왜. 그래도 쟤 혼자서 일당백 역할 하잖아.
낙수
일당백은 개뿔.
현장 투입했다가 되려 타깃들이 의뢰인 대신 쟤 얼굴 보고 반하는 바람에 빠꾸맞은게 얼마나 많았냐. 우리가 환불해준 돈만 쟤 월급의 넉 달치는 될 걸.
정우성, 아랑곳 않고 대걸레 자루를 쥐며 몸을 흔든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우성, 배달기사가 온 걸 귀신같이 알고 문을 연다.
배달 기사, 철가방을 열고 자장면 다섯 그릇을 내려놓는다.
우성
(두리번거리다 황당한 얼굴로)
뭐야! 깐풍기 안 시켰어요?
현철
깐풍기 같은 소리 하네. 짜장면이나 먹어.
우성
짠돌이......
신현철이 꿀밤을 놓자 정우성의 입이 댓발 튀어 나온다.
배달기사
맛있게 드십쇼!
문 밖으로 사라지는 배달기사.
자장면을 비닐을 벗기고 먹기 시작하는 다섯 남자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어떤 20대 여자(성희)가 조심스레 문을 연다.
입을 재빨리 훔치는 산왕 단원들.
현철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희
여기가 혹시......
성희에 손에는 얼마 전 정우성이 뿌리고 다녔던 분홍 찌라시 명함이 들려 있다.
찌라시 명함에 Close-Up.
쥐도 새도 모르게 당신의 사랑을 이뤄드립니다. 지금 바로 산왕 연애 조작단에 전화하세요! 011 XXX XXXX.
새 손님인 걸 눈치챈 다섯 명은 먹었던 자장면 그릇을 후다닥 치운다.
동오
(눈치 빠르게 소파로 안내하며)
예,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쪽으로.
성희는 소파에 앉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정우성, 단발머리의 성희를 흘긋 바라보며 녹차 티백을 뜨거운 물에 우린다.
V.O (우성 목소리)
산왕 연애 조작단.
당신도 짐작했듯이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연애를 조작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란 뜻이다.
정우성, 찻잔을 성희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꽃미소를 싱긋 짓는다.
우성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V.O (우성 목소리)
사람들은 사랑이 대단한 것인마냥 거창하게 떠들어대지만, 사실 사랑은 별 거 아니다. 다 짜고치는 고스톱에서 피어나는 쌍피다. 별 거 아닌 우연들이 모여 진짜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우린 그 '별 거 아닌 우연들'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 거고.
카메라가 분주히 상담 준비를 하는 산왕 멤버들의 모습을 훑는다.
V.O (우성 목소리)
그럼 내가 하는 역할은 뭐냐고?
성희가 찻잔을 들어 녹차를 한 모금 마신다.
V.O (우성 목소리)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일 뿐이다.
대본 없는 무대에서 인간들은 어떤 사랑을 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곤 한다.
그럼 내가 하는 역할은 사람들이 짝짓기를 할 수 있도록 무대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소파에 옹기종기 붙어 앉은 산왕 멤버들. 정우성도 끄트머리에 앉는다.
성희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제가...... 최근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아, 막상 말하려니까 부끄럽다. 이거 어디 다른 데에 말씀하시면 절대 안 돼요?
동오
(꽃미소를 날리며)
저희는 의뢰인의 비밀을 절대 엄수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희
사실 제가 회사 대리님을 좋아하게 됐거든요. 좀 특이하긴 한데 다정하고 좋은 분이세요.
제가 회사에서 큰 실수를 하나 했었는데 대리님께서 괜찮다고 저를 다독여주시는 모습에 반했어요.
현철
혹시 그분 사진이 있습니까? 정보는 뭐든 좋으니 알려주십시오.
성희
저보다 2살 많은 남자구요, 방금도 말씀드렸다시피 좀 특이해서 술 취하면 이상한 말투를 쓰긴 해요......
아! (가방을 뒤적이며) 제가 회사 워크샵 갔을 때 용기내서 같이 찍은 사진 하나가 있어요.
성희, 핸드폰 플립을 열어 사진을 보여준다.
머리를 모아 사진을 본 산왕과 정우성, 동시에 같은 표정을 짓는다.
V.O (우성 목소리)
......그리고 난 내 첫사랑이 나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내 남자를 위한 역할
글쓴이: 람사
#3 성희가 떠나고 난 후
우성
우리 이 의뢰 건 맡지맙시다!
정우성의 큰 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쏠린다.
낙수
왜?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서?
우성
(어색한 표정과 몸짓으로)
아는 사람이요? 우리가 아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성구
연기 잘하는 녀석이 이럴 땐 또 발연기하네.
낙수
명헌이랑 그렇게 한 몸처럼 붙어다녔으면서 갑자기 웬 모른척이야. 그냥 까놓고 인정해. 얘 대상으로 작업 들어가는 게 불편하다고.
우성
아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작업 들어간다뇨. 우리가 조폭도 아니고.
자신의 변명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정우성이 작전을 바꾼다.
우성
(헛기침을 하며)
큼흠. 그게 사실.......
(진지하게 태도를 잡으며) 우리가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다들 취업이 안 돼서 생활비 벌려고 한 거잖아요.
시작한지 어언 5년이나 됐기도 했고.......
근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순 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우리도 본래 의미였던 극단으로 다시 되돌아가죠.
맨땅에 헤딩하듯 극단을 운영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산왕 단원들.
동오
하긴, 그때만큼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 없었지.......
낙수
(딱 자르듯)
사무실 일 하면서 밥 벌어 먹고 사니까 다들 배가 불렀구만? 우리 다음달 낼 월세도 빠듯한 거 몰라? 한 건이라도 더 맡아야할 판에 퇴짜 놓으면 안 되지.
성구
그냥 이 일만 패스하고 사무실 일은 계속하면 안 되는 거야? 나도 옛 친구 상대로 속이는 게 뭔가 기분이 그래서.
낙수
친구같은 소리하네. 떠날 때 인사 한 마디 없고 그 뒤로 연락 하나 없는 게 친구냐?
동오
(달래듯)
낙수야.
낙수
아니 내 말이 틀렸냐고.
어느덧 사무실 안은 성구, 동오, 낙수의 설전으로 왁자지껄해진다.
소란의 원흉인 정우성은 눈알을 굴리며 상황을 지켜본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신현철, 마침내 결심한 듯 의자 팔걸이를 탁 친다.
현철
낙수 말이 맞아. 우린 다음달 월세도 내야하고 장비 할부도 남아 있어.
이 일은 아직 그만두면 안 돼.
낙수
거 봐.
현철
그렇지만 우성이 말도 맞아. 언젠가부터 우리가 이 사무실을 차렸던 본래 의도가 퇴색되고 있는 것 같다.
우성
(얼굴빛이 밝아지며)
그렇죠!
현철
그러니까 이번 프로젝트까지만 맡고 사무실 일은 종료하도록 한다.
정우성의 입이 떡 벌어진다.
현철
여기까지. 이상 이의있는 사람?
모두가 고개를 흔드는 가운데 정우성이 나선다.
우성
저요! 그만두려면 단칼에 그만둬야지 왜 이것까지 하고 그만둬요! 형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어요?
현철
왜, 정우성. 이 의뢰건을 맡으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
정우성, 눈에 띄게 멈칫한다.
우성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요.
현철
그리고 너, 아직 채무금 월급에서 깔 거 남아 있는 거 알지? 저번에 김민수 의뢰인이 네가 새로운 남자친구인 줄 알고 화나서 환불 요구한 거랑, 최미혜 의뢰인이 너한테 반해서 프로젝트 무산됐던 거랑 , 서영수 의뢰인 타깃이 너한테 고백하는 바람에 또 파토나서 난리났던 거.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이번엔 얄짤 없이 빼지 말고 참여해라.
정우성, 불만에 가득 찬 얼굴과 함께 큰 소리로 궁시렁거린다.
우성
이게 산왕 연애 조작단인지 산왕 대부 업체인지.
현철
이번 것만 잘 마무리되면 채무금 전부 까줄게.
우성
아, 알았어요!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완전 짠돌이.
현철
(팔근육을 불끈거리며)
지금 짠돌이라 했냐, 정우성?
우성
(재빠르게 도망가며)
저 먼저 퇴근할게요!
#4 INT. 정우성 원룸, 저녁
문을 열고 원룸에 들어서는 정우성.
지친듯 방 한구석에 가방을 팽개치고 쓰러지듯 의자에 앉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우성은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사진 한장을 꺼낸다.
사진을 보면 앳된 얼굴의 산왕 식구들 4명과 정우성, 그리고 이명헌이 손모양으로 브이를 하고 있다. Close-up
복잡한 눈빛을 하는 정우성. 디졸브.
#5 INT. 남고 연극부 부실, 10년 전- 낮
한참 연극 준비에 바쁜 고등학교 시절 산왕 부원들(18세).
정성구, 소품을 만드느라 인상을 쓰며 집중한다. 김낙수, 터진 옷에 바느질을 하고 있고 최동오는 그 옆에서 앉아 열심히 대사를 외운다. 이명헌과 신현철은 교실 한 구석에서 소품용 칼로 싸우는 시늉을 하고 있다.
낙수
야 이 새끼들아 먼지 날려.
아랑곳 않고 칼싸움을 하는 명헌과 현철.
그때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앳된 얼굴을 한 정우성(17세)이 고개를 내민다.
우성
여기가 산왕 연극부 맞아요?
부실 내 모든 이의 시선이 정우성에게 꽂힌다.
낙수
입부 기간 지났는데
우성
(뚱하게)
전학온지 얼마 안돼서 그래요. 저 연기 잘하는데 그냥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이명헌을 제외한 네 명은 맹랑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현철
그래, 연기 잘 하는 신입생. 이름이 뭐냐.
우성
정우성이요.
그 때 이명헌이 천천히 뒷짐을 진다.
명헌
지금 바로 오디션 볼 수 있뿅? 외우고 있는 독백연기는 뿅?
우성
(씨익 웃으며)
그건 기본이죠.
#6 칠판 앞
서서 독백 연기를 하는 정우성.
우성
(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니나, 나는 당신을 저주하고 증오해서 당신의 편지와 사진은 모두 찢어버렸어.
그렇지만 내 마음이 영원히 당신에게 묶여 있는 것은 늘 알고 있었어.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멈출 힘이 내겐 없어, 니나.
당신을 잃은 이후로 내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어. 나는 고통 속에 살고 있어.
젊음은 내게서 사라져버린 듯해. 마치 아흔 살 노인이 된 기분이야.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이 걸었던 땅에 입을 맞춰.
어디를 보아도, 나는 당신의 얼굴이 보여.
한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비추던 그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안톤 체호프 / 갈매기 중]
정우성의 열연에 감동 받은 듯 조용해지는 부실 안.
여운이 가시자 이명헌을 제외한 네 명이 박수세례를 보낸다. 정우성은 으쓱 어깨를 들어보인다.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한 얼굴이다.
명헌
불합격 뿅.
우성
(큰 소리로)
네? 제가요?
다른 부원들도 이명헌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는다.
정우성은 화가난 듯 이명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나머지 부원들은 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모여든다.
우성
제가 왜 불합격인데요.
명헌
너무 겉멋 들었다, 뿅.
우성
(자존심이 상한듯)
저 살면서 연기 못한다는 소리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요?
명헌
그럼 내가 지금 처음으로 말해주겠뿅.
이명헌을 계속 노려보는 정우성. 반면 이명헌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우성
(여전히 이명헌을 노려보며)
오디션 다시 보게 해주세요. 똑같은 대사로.
명헌
포기하는 게 좋을 텐데, 뿅.
우성, 화난 표정을 짓는다. 포기라는 말이 정우성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다.
우성
제 사전에 그딴 거 없는데요.
명헌
마음대로 해, 뿅.
우성
언제 오면 되죠?
명헌
다음주 수요일 방과 후, 뿅.
우성, 드르륵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나간다.
우성이 떠난 후 이유를 물어보는 동오.
동오
명헌아. 쟤 왜 떨어뜨린 거야? 쟤 걔 아냐? 재작년 중등부 전국 독백 연기 대회에서 대상받았던 애.
현철
깡도 장난 아니던데. 오디션 보는데 저걸 갖고 왔네. 저 독백 갖고 온 애들은 보통 두 부류잖아. 멋 모르고 유명하니까 시도하는 애들이거나. 아니면,
명헌
(말을 가로채며 벌떡 일어선다.)
천재거나, 뿅.
이명헌, 소품용 칼을 현철에게 겨누며 진지하게 말한다.
명헌
드미트리우스는 어디 있지?
오, 그 더러운 이름이 내 검에 죽어 없어질 말이란게 참 잘 어울리는구나. 뿅!
[한여름 밤의 꿈 - 셰익스피어]
#7 INT. 방과 후 부실.
이번엔 혼자 부실에 앉아 있는 이명헌.
얼마 안 있어 우성이 문을 열고 등장한다.
기세와 의욕으로 중무장한 정우성, 꾸벅 인사한다.
대본책을 들여다보며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하는 이명헌.
정우성, 있는 힘을 다해 연습해온 대로 열정적인 독백을 한다.
이명헌, 보던 책에서 시선도 안 뗀다.
정우성, 기분이 나쁘지만 독백을 무사히 마친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엔 진짜 잘한 것 같다.
그때 이명헌이 벌떡 일어선다.
명헌
다시, 뿅.
우성
(황당한듯)
또요?
명헌
다음주 똑같은 시간, 뿅.
부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이명헌.
CUT TO.
열받은 우성은 같이 뛰어나가 명헌의 팔을 붙잡는다.
우성
(화난 듯 씩씩거리며)
왜 자꾸 떨어뜨리는 거예요. 선배가 보기에도 저 잘한 거 맞잖아요!
명헌
그걸 알아오는 게 네 숙제, 뿅. 안 그럼 받아줄 수 없뿅.
다시 휙 돌아서 가는 명헌.
카메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우성의 꽉 움켜쥔 주먹을 비춘다.
MONTAGE SEQUENCE
#8 INT. 18세 우성의 방
열심히 연기 연습을 하며 방 안을 돌아다니는 우성.
방 안을 걸어다니다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하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INT. 부실 내
정우성이 대사를 반 정도 읊었을 때 이명헌이 말한다.
명헌
다시, 뿅.
INT. 우성의 방.
열정적으로 대사를 소리치는 우성.
열린 방문 틈으로 광철(우성 아버지)와 미사(우성 어머니)가 서로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INT. 부실
정우성이 첫 대사를 읊는다.
명헌
다시, 뿅.
INT. 우성의 방
대사를 하나하나 줄치며 꼼꼼히 분석하는 우성.
분석하다가 갑자기 화가 났는지 에잇 소리를 내며 대본 종이를 바닥에 패대기친다.
이윽고 다시 종이를 집어드는 우성.
INT. 부실
소품과 옷까지 챙겨와 기대에 찬 얼굴로 명헌을 바라보는 우성
명헌
다시, 뿅.
INT. 우성의 방
우성,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한다.
INT. 연극부실
명헌
다시 뿅.
INT. 연극부실 (다음 날)
명헌
다시 뿅.
INT. 연극부실 (다다음날)
명헌
다시 뿅!
INT. 우성의 방
우성
그놈의 뿅뿅뿅!
우성, 지친듯 침대에 털썩 쓰러진다.
잠이 들자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대본 종이가 스르륵 떨어진다.
볼펜으로 분석한 흔적이 가득한 뜨레플레프의 독백으로 CLOSE-UP
#9 INT. 부실
아무말 없이 명헌을 노려보는 우성.
명헌
포기, 뿅?
우성
아니거든요!
CUT TO.
문을 열며 현철과 함께 동오, 성구, 낙수가 등장한다.
현철
야 그러지 말고 먹고 해, 먹고.
일로 와. 니 것까지 시켰으니까 같이 먹자.
우성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희 배달음식 반입 안 되지 않아요?
동오
그러니까 몰래 먹어야지.
부지런히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자장면과 단무지를 세팅하는 산왕 부원들. 서로 양이 더 많이 보이는 자장면을 먼저 집으려 티격태격한다.
한편, 정우성은 자존심에 아랫입술을 내밀며 버티고 서 있다. 아무렇지 않게 정우성의 것으로 보이는 자장면까지 가져가는 이명헌.
명헌
아싸. 두 그릇 다 내 거, 뿅.
그 말에 씩씩거리며 마지못해 산왕 부원들 틈에 끼어 앉는 정우성. 불만스러운 얼굴로 음식이 차려진 바닥을 둘러본다.
우성
깐풍기는 없어요?
현철
깐풍기 모양으로 암바 한 번 당해볼래?
하는 수 없이 나무젓가락을 쪼개고 비닐을 벗긴 후 자장면을 비비려는 정우성. 자장면이 식어 떡진 바람에 잘 안 비벼진다.
그때 누군가 잘 비벼진 자장면 그릇을 슥 내민다. 이명헌이다. 아무렇지 않게 정우성의 자장면 그릇을 가져가 대신 비비기 시작한다. 머쓱한 기분에 자장면 그릇만 만지작거리는 우성.
#10 산왕 사무실, 현재
자장면 Match Out.
불어서 떡진 자장면을 앞에 두고 회상에 빠져 있는 정우성에게 현철이 딱밤을 때린다.
현철
뭐하냐. 안 먹고 고사지내?
우성
아, 아파요! 형은 험상궂게 생겨서 자꾸 때리면 남들이 조폭이라고 생각할 걸요.
신현철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고개를 한 바퀴 돌린다.
현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암바를 당하며 우는 우성과 익숙한 듯 자장면을 먹는 낙수, 성구, 동오.
#11, (1시간 후)
동오
일단 새로운 타깃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
낙수
(날카롭게)
잘 알긴 뭘 잘 알아. 생각해보면 걘 우리한테 한 번도 솔직한 적 없어.
성구
근데 나도 막상 명헌이에 대해 떠올려보려니까...... 걔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이 안 되네.
현철
일단 하나씩 말하면서 정리해보자.
#12, (30분 후)
연극부 부장, 이상한 어미를 붙임, 매점을 좋아함.
달랑 세 줄 적혀 있는 종이에 줌인.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산왕 단원들.
동오
심각한데? 우리가 아는 건 이게 전부라니.
성구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예전과 같을지도 의문이고.
회사다닌다는 거 보면 연기는 이제 안하는 것 같은데.
동오
딴 사람은 몰라도 명헌이는 계속 연기할 줄 알았는데......
낙수
연기하겠답시고 여기서 아등바등거리는 우리보다 걔가 훨씬 똑똑한 거지.
팔짱을 끼며 깊은 생각에 골몰해 있던 현철. 난데없이 정우성을 부른다.
현철
정우성. 넌 뭐 좋은 아이디어 없냐?
밀키스를 마시며 작게 그윽 트림한 정우성.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현철
그러냐?
현철,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한다.
현철
정우성. 이번 프로젝트 총괄 기획은 전부 네가 맡아.
음료를 마시던 정우성은 내뿜을 뻔하다.
우성
에엑? 제가요? 제가 왜요?
현철은 칠판에 정우성의 이름을 적고 동그라미를 친다.
현철
아무리 생각해도 너만한 적임자가 없어. 네가 전부 맡도록 해.
우성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한 부적임자는 없는 거겠죠! 싫어요! 저 이런 거 잘 못한단 말이에요! 차라리 연애 중인 동오 형한테 시켜요!
현철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정우성. 채무금은 잊지 않았겠지?
우성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아오, 진짜! 전 싫다니깐요! 못해요!
신현철은 정우성에게 태연히 암바를 건다.
나머지 산왕 단원들은 익숙한 듯 '산왕 연애 조작단 이명헌 프로젝트 계획서'의 총괄란에 정우성을 써 넣는다. 정우성의 비명소리와 함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줌 아웃.
#13 EXT. 교보역 사거리. 오후 5시 50분 경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정우성. 190이 넘는 훤칠하고 잘생긴 모습에 행인들이 그를 돌아본다.
V.O (정우성 목소리)
나는 사람들의 사랑을 이뤄주는 일을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연애, 사랑 그딴 것들은 딱 질색이다.
이 일을 하다보면 별꼴을 다 본다. 그중 열에 일곱은 상대방이 바람 피웠다며 울고불고 나머지는 헤어져서 남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1%는 결혼까지 성공하지만, 결혼한다고 해서 과연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이어질까?
뭐 간혹 우리 엄마 아빠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잉꼬부부인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 속 사랑은 극처럼 아름답지 않다. 눅눅하고 질척하고 더럽고 감정적이다. 그래서 난 연애도, 사랑도 하지 않는다.
어떤 여성이 정우성을 보고 번호를 물어볼까 하다가 헤드폰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에 포기한다.
V.O (정우성 목소리)
이게 내가 길을 걸을 때 헤드폰을 꼭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정우성은 성희가 알려준 이명헌의 직장 근처에 서 있는다.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 클로즈업. 3초, 2초, 1초. 땡 하자마자 사람들이 건물로부터 서서히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어느새 길에는 수많은 퇴근 인파로 북적북적하다. 정우성은 이명헌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헌(20대)이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는 동료로 보이는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봄 코트를 입고 빡빡이 시절과 달리 기른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린 이명헌의 모습. 슬로우 모션. 음악이 깔리며 이명헌의 움직임과 정우성의 흔들리는 눈을 번갈아 잡는다.
이내 고개를 젓고 정신을 다잡는 정우성. 이명헌은 동료와 헤어지고 천천히 길을 걷는다. 우성은 몇십 미터 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미행한다.
그때 어느 건물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앞에 명헌이 멈춰선다. 멀리서 지켜보는 우성. 명헌은 한동안 포스터를 바라보고 정우성은 그가 떠난 후 포스터를 확인한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정우성. 포스터에는 커다란 글씨로 연극 '시라노'라고 써 있다. 포스터로 줌인. Fade-out.
#14 INT. 10년 전 기숙사방.
기숙사 창문 아래로 몰래 커튼줄을 내리는 성구, 동오. (우스꽝스러운 음악)
CUT TO.
배달부가 끈에 묶여 있는 돈을 주머니에 놓고 자연스럽게 자장면이 든 봉지를 줄에 꽉 묶는다.
CUT TO.
커튼 줄을 올리는데 이명헌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그 옆엔 정우성이 같이 서 있다. 끈을 놓칠 뻔한 성구는 성질을 낸다.
성구
야, 이명헌!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 깜짝 놀랐네.
명헌
왜 이렇게 안 오냐, 뿅. 하도 소식이 없길래 와 봤다, 뿅.
동오
좀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조심스럽게 끈을 끝까지 올린 성구와 동오는 끈에 묶인 배달 음식을 풀어낸다. 기숙사 문을 나서서 부실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가는 네 사람.
CUT TO.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철은 음식 봉지를 받아들어 자연스럽게 셋팅한다. 우성, 음식을 보고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우성
뭐야. 또 짜장면이에요? 하다못해 치킨, 피자 이런 거라도 좀 시키던가.
현철
이게 제일 싸고 맛있으니까 그렇지 인석아.
우성
깐풍기 먹고 싶은데.
현철
깐풍기 모양으로 다시 암바 당하고 싶냐?
화들짝 놀라 현철 곁을 피하는 우성.
명헌
우성이 오디션에 합격하면 깐풍기 사준다, 뿅.
명헌을 노려보는 우성.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명헌이 비벼준 자장면 그릇을 받아든다. 같은 부원은 아니지만 마치 정식 부원처럼 산왕 멤버들과 친근해 보인다. 우성이 어느덧 그들과 꽤 친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동오
음식 갖고 오는 것도 예전만큼 만만치 않아. 너무 빡세졌어.
낙수
그러니까. 어떤 새끼가 배달 음식 처먹고 아무데다 버려논 거야? 알기만 해 봐라.
열심히 자장면을 흡입하는 여섯 사람.
명헌이 단무지를 입에 넣으며 운을 뗀다.
명헌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되는 사람, 뿅.
성구
왜?
명헌, 뒷주머니에서 미리 프린트 해두었던 포스터 종이를 꺼내 펼쳐보인다.
포스터에는 '시라노'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있다.
현철
오, 이거 니가 전부터 보고 싶다고 했던 거 아니냐?
명헌
뿅.
현철
(포스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야 근데 이거 서울에서 하는데? 너 서울까지 가게?
명헌
뿅. 기차타고 나랑 같이 갈 사람 뿅?
동오
그런데 쌤이 허락을 해주실까?
명헌
이럴 줄 알고 미리 외출증도 받아놨다 뿅. 연극부가 연극 좀 보러 간다는데 뭐 어떠냐 뿅. 하루만에 빨리 기차타고 갔다오면 된다 뿅.
그래서 누가 나랑 같이 갈 거야. 빨리 말해 뿅.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싸움을 하는 산왕 부원들.
성구
(고개를 저으며)
난 본가에 가봐야 돼
동오
난 시험공부.
낙수
나도 수행평가 준비해야 돼서 안됨.
현철
(미안한 표정으로)
난 그거 예전에 이미 봤어서 별로.
자연스럽게 모든 이의 고개가 열심히 자장면을 흡입 중인 우성에게로 돌아간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눈치챈 우성이 질겁한다.
우성
(질겁을 하며)
엑? 싫어요, 전! 무슨 그거 보러 선배랑 서울까지 가요!
명헌이 과장되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현철에게 푹 기댄다.
명헌
현철...... 나 상처받았어용 흑흑. 내가 우성 짜장면도 비벼줬는데.
현철
(일부러 심각한 표정으로)
우성아. 아무리 그래도 사람에게 질색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우성
(당황하며)
아, 아니 질색한 게 아니라! 무슨 남자끼리 데이트를 해요! 남사스럽게.
낙수
이명헌은 그냥 연극보러 가자고 한 건데 왜 오바질이야. 너야말로 명헌이랑 그렇고 그런 거 상상했냐?
우성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렇고 그런 거라뇨! 아니라니깐요!
낙수
그럼 같이 못 갈 이유가 뭐 있어? 너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우성
제가 왜 할 게 없어요! 저 바빠요!
낙수
왜 바쁜데.
우성
그, 그게 어...... 공부도 해야하고.....
순간 전원이 콧방귀를 뀐다.
현철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녀석이 영어를 YES I DO 밖에 모르냐?
우성
아, 아니! 그, 저, 연기 연습도 해야하고......
동오
이참에 그럼 명헌이랑 연극보러 가. 명헌이 고등부 독백 연기 대회 대상이잖아. 연극 보는 것도 연기 연습에 도움이 돼.
우성, 두 눈이 동그래진다.
우성
대상탄 사람이 명헌 선배였다고요?
낙수
야, 넌 명색이 중등부 대상이었던 애가 명헌이도 모르냐.
우성
전 원래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요.
명헌
우성. 만약 이번에 나랑 같이 갔다오면 입부를 허락해주겠다 뿅.
우성
(좋아했다가 발끈하며)
아, 알았어요! 가요, 가! 가면 될 거 아니에요!
대신 오디션은 별개로 계속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걸로 대신 퉁치긴 싫어요.
#15 교보역 사거리 - 현재.
회상에서 빠져나온 정우성.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연극 시라노 포스터를 뗀다.
#16 산왕 극단 사무실
정우성이 '이명헌 공략하기 프로젝트'라 적힌 칠판에 시라노 포스터를 자석으로 붙인다. 산왕 단원들은 갸우뚱해 한다.
낙수
고작 연극을 보러 간다고? 저거 너랑 명헌이가 이미 예전에 보러 가지 않았었나?
우성,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성
봤든 안 봤든 이걸로 가야 해요.
성구
여태까지 해왔던 것보단 너무 약한데...... 최소한 이명헌이 잃어버린 USB를 성희 씨가 대신 찾아주는 정도의 스케일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우성
아뇨. 이거여야 해요. 저한테 맡겨주신 이상 제 뜻대로 따라주세요.
현철
우성이가 총괄 디렉을 하기로 했으니까 우성이한테 전적으로 맡기자.
현철, 이전과 달리 강경해 보이는 우성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17, 토요일, 시라노 극장 앞
홀로 시라노 포스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이명헌.
한편 수풀 뒤에 숨어 있던 정우성은 송신기로 성희의 귓속에 끼워진 수신기를 통해 큐 사인을 보낸다.
우성
자, 성희 씨. 우리 연습한 대로만 가면 되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자 하이, 큐!
뒤에 서 있던 성희가 정우성의 신호를 듣고 명헌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성희
어머, 이 대리 님!
명헌, 뜻밖이라는 눈길로 성희를 바라본다.
명헌
아, 성희 씨.
성희
대리님도 이 연극보러 오신 거예요? 티라, 아, 아니 시라노?
명헌
네. 성희씨도 보러 오신 건가요?
성희
네. 마침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쓸쓸했는데. 대리님이 저랑 같이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성희, 명헌이 미처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팔을 잡고 매표소 쪽으로 이끈다.
우성
동오 형, 지금 갈게요.
매표소 앞에 도착한 성희와 명헌. 티켓을 사자 매표소 직원으로 변장한 동오가 변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동오
지금 커플석만 남아 있습니다.
명헌
(머뭇거리다)
네 그 좌석이라도 주십시오.
티켓을 받아든 명헌과 성희,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현철과 성구, 우성을 향해 따봉을 들어보인다.
#18 시라노 극장 안
커플석에 나란히 앉아 연극 시라노가 시작하길 기다리는 명헌과 성희. 그들의 두 줄 대각선 뒤의 좌석에 앉아 있는 정우성. 검은색 챙모자를 쓰고 이명헌의 옆모습만 계속 바라보며 어느덧 회상에 빠진다.
#19 EXT. 학교 건물 밖. 10년 전, 오전 6시 경.
해가 터오르는 새벽.
대충 검정 추리닝에 운동화를 신고 백팩을 멘 정우성이 하품을 하며 걸어나온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다.
교문 앞에 미리 서 있는 이명헌. 깨끗한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크로스백을 멘 그의 모습은 교복을 입을 때와는 달라보인다. 정우성은 추리닝을 입고 나온 자신이 뻘쭘해진다.
우성
선배 일찍 나오셨네요.
명헌
뿅. 갈까.
#20 버스정류장.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약간 떨어져 나란히 앉은 우성과 명헌.
우성은 명헌과 단둘이 있는게 기분이 좀 이상하다.
버스 안에 올라탄 둘은 나란히 앉아 앞을 바라본다. 아직 어색해 보이는 둘이다.
괜히 말을 걸어보는 우성.
우성
선배. 오늘 안에 보고 돌아올 수 있겠죠?
명헌
뿅.
단답에 할 말을 잃은 우성은 머쓱히 입을 다문다.
#21 INT. 기차역 안
우성, 기차표를 예매하려 지갑을 꺼내자 명헌이 만류한다.
명헌
기차표는 내가 살게, 뿅.
CUT TO.
이른 아침이라 기차 안은 사람이 별로 없다.
좌석에 차례대로 앉는 우성과 명헌. 얼마 안 있어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한다.
오랜만의 기차 여행에 들떠보이는 우성.
명헌
우성. 아침은 먹고 왔냐, 뿅.
우성
아뇨. 저 원래 아침 잘 안 먹어요.
명헌
(가방을 뒤적이며)
도착하려면 한참 남아서 안 먹어두면 배고플 거다, 뿅.
명헌, 가방에서 미리 얼려둔 게토레이와 락앤락 통, 나무젓가락 두개를 꺼낸다. 락앤락 통을 열면 그 안엔 예쁘게 만든 유부초밥이 가득 담겨있다.
우성
우와. 이거 선배가 만든 거예요?
명헌
뿅. 얼른 먹어라.
우성, 유부초밥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초밥을 집어들어 입에 넣는다. 막상 먹어보니 맛있다.
몇 개 안 먹고 젓가락을 내려두는 명헌.
우성
(우물거리며)
선배는 더 안 드세요?
명헌
난 아침을 먹고 와서 배불러, 뿅. 너 다 먹어라, 뿅.
우성, 맛있게 초밥을 다 먹어치운다.
#22 기차 안 (3시간 후)
슬슬 지루해져 가는 우성과 명헌.
명헌
우성. 우리 심심한데 게임이나 하자, 뿅.
우성
(시큰둥하게)
무슨 게임이요?
명헌
(심술궂게 웃으며)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딱밤맞기, 뿅.
MONTAGE SEQUENCE
CUT TO.
우성, 명헌, 가위 바위 보! 우성이 앞머리를 올리고 명헌, 딱밤을 때린다.
우성
아야!
우성,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댄다.
CUT TO.
우성, 명헌, 다시 가위 바위 보! 명헌, 딱밤을 때린다.
우성
아야!
CUT TO.
명헌, 딱밤을 때린다.
우성
아야!
CUT TO.
벌게진 이마를 하고 식식대는 정우성.
우성
좀 살살 때려요!
명헌
그러게 이기지 그랬니 뿅.
다시 가위바위보. 이번엔 우성이 이긴다.
우성
아싸! 빨리 대요.
기차에서 서울역 도착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명헌
도착했다 뿅. 내릴 준비하자.
우성
아 뭐예요! 이마는 맞고 가야죠!
우성의 말을 무시하고 먼저 일어서서 가는 명헌.
우성
(서둘러 따라 나가며)
아 어디 가요! 빨리 이마 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