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EXT. 대학로 거리 한복판.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서울 구경에 여념이 없는 정우성.
명헌
촌놈 티 내지 마라, 뿅.
우성
아니거든요! 치......
우성, 민망한 듯 눈을 흘기다가도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대학로를 구경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버거킹 외관을 보고 침을 꼴깍 삼킨다.
명헌
저거 먹고 싶냐, 뿅.
우성, 일부러 자존심 상해서 아닌 척 한다.
우성
아, 아뇨! 그냥 우연히 본 거예요!
명헌
난 배고프다. 저거 먹을 건데 너도 같이 먹을래, 뿅?
우성
(큼흠 헛기침을 하며)
뭐 선배가 먹고 싶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제가 같이 먹어드릴게요!
#24 패스트푸드점 카운터 앞
명헌
데리야끼 치킨 버거 세트 하나랑 새우 버거 세트 하나랑 밀크셰이크 두 개요.
정우성이 돈을 내려고 하자 이명헌이 손으로 만류하고 제 카드를 직원에게 건넨다.
머쓱하게 뒷목을 긁는 정우성.
우성
제가 내도 되는데......
명헌
이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다, 뿅.
CUT TO.
한가득 차려져 있는 버거와 감자튀김, 콜라, 밀크셰이크. 두 사람은 입 안 가득 버거를 밀어 넣고 맛있게 흡입한다.
정우성의 입가에 데리야끼 소스가 묻는다. 이명헌이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 입가를 닦아준다. 민망해서 괜히 몸을 뒤로 물리고 냅킨으로 벅벅 닦는 정우성. 얼굴이 빨개진다.
#25 대학로 사거리
길가를 돌아다니는 우성과 명헌. 닭꼬치를 먹으며 거리를 구경하다가 오락실을 발견한다.
우성
저 여기 들어가 보고 싶어요.
다먹은 꼬치를 쓰레기통에 넣고 오락실 안으로 들어가는 우성과 명헌.
두 사람은 곧 오락실 안을 돌아다니며 철권, 메탈 슬러그, 핑퐁 등의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하는 족족 정우성이 지지만 열띤 기색이 얼굴에 떠오르며 매우 즐거워 보인다.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을 재미있게 한 후 어슬렁거리며 다른 게임을 물색하던 중 구석에 놓인 농구게임 기계를 발견한다.
우성
선배! 우리 내기 농구해요!
명헌
뭐 걸고, 뿅.
우성
음...... 진 사람 소원 들어주기!
명헌
이긴 사람 소원을 들어줘야지 무슨 진 사람 소원을 들어줘.
우성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건 너무 뻔하잖아요.
농구 기계에 코인을 넣고 불이 들어오자 정신없이 농구공을 던져넣는 둘.
게임이 끝나자 전광판에 497, 495라는 숫자가 뜬다. 근사치로 명헌이 졌다.
우성
앗싸 이번엔 내가 이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할걸.
근데 선배도 농구 게임 엄청 잘하네요? 저 완전 이 게임 손에 달고 사는데.
명헌
농구선수 해도 되겠네 뿅.
우성
연기 아니었으면 아마 전 농구선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키도 크고! 잘생겼고! 아닌가? 모델이 더 어울리나?
선배 갑자기 어디 가요?
별안간 주먹을 쥐고 옆에 있는 펀치 기계에 강펀치를 날리는 이명헌. 만점 가까운 숫자가 나온다.
우성,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이 선배에게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한다.
#26 달고나 좌판
같이 달고나 뽑기를 하는 둘. 명헌은 하트 모양의 달고나, 우성은 별 모양의 달고나다. 우성은 달고나를 바늘로 찌르다가 뽀각 깨뜨린다. 울상을 짓는 우성.
#27 마로니에 공원 야외 공연장
나란히 서서 버스킹 노래를 들으며 구경하는 둘.
밴드가 스탠딩 에그의 '사랑한다는 말'을 부른다.
초반의 어색했던 모습과 다르게 매우 가까워진 듯한 두 사람이다.
#28 소품샵
여자들이 가득한 소품샵 한가운데 불쑥 솟은 두 사람의 머리. 우성과 명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키링 진열대 앞에 가까이 선다.
명헌은 리락쿠마 인형을 집어들어 정우성 얼굴 가까이에 대본다.
명헌
이거 우성 닮았다, 뿅.
우성
에엑! 제가 뭘 닮았어요!
명헌
짜장면 볼 때 우성 표정이 딱 이렇다. 엄청 닮았다, 뿅.
입술을 삐죽거리며 매대를 둘러보던 정우성, 이내 키득키득거리며 파란 인형 키링 하나를 집어든다.
우성
(명헌 얼굴에 키링을 갖다대며)
이거 선배랑 엄청 닮았다.
스티치 인형 키링에 Close-Up.
CUT TO.
두 사람의 가방에 나란히 매달려 있는 리락쿠마 인형 키링과 스티치 인형 키링.
#29 한산한 시라노 극장 - 저녁
당황한 두 사람의 얼굴.
극장 앞엔 안내문구로 이렇게 써 있다.
<극단 내부 사정으로 인해 어제부로 상영이 조기 종료되었습니다. 남은 일정 및 관련 사항은 별도 공지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객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성
헐, 선배. 이거 어제 끝났나 봐요. 어떡하죠? 이거 보러 온 건데.
명헌 역시 예상 밖의 일에 난처한 얼굴이다.
명헌
어쩔 수 없다. 그럼 다른 연극이라도 보고 가자, 뿅.
우성
괜찮겠어요? 선배 이거 보고 싶었다면서요.
명헌
안 하는 걸 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있는 건 아니지 않니, 뿅.
#30 상상 극장 내부
연극 갈매기가 한창이다.
열연하는 배우들과 집중해서 보는 우성과 명헌
#31 연극이 끝난 후
우성
아 잘 봤다. 재밌었어요, 선배. 이제 우리 기차타러 가야하죠?
명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연극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시간이 좀 빠듯하다. 일단 택시를 타자.
#32 택시 안
교통이 혼잡한 도로와 빵빵거리는 경적음.
초조해보이는 정우성의 얼굴 줌인. 반면 명헌은 태연해보이기만 한다.
#33 기차역
기차역으로 서둘러 달려가는 두 사람. 그러나 이미 기차는 떠난지 오래다.
우성
(울상을 지으며)
선배, 어떡하죠? 다음 기차도 전부 매진이던데.
생각에 빠진듯한 명헌.
명헌
잠시만 기다려봐라, 뿅.
대합실 한 쪽 구석에 가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명헌. 곧이어 다시 돌아온다.
명헌
학생부장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내일 가겠다고했어, 뿅.
우성
네? 그럼 우리 지금 이 밤에 어디로 가요?
#34 대형 찜질방
우성과 명헌, 각각 주황색 찜질복을 입고 양머리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다. 신기한듯 찜질방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우성.
우성
와, 저 찜질방 처음 와 봐요!
명헌
여태 찜질방 한 번 안 와보고 무슨 삶을 산 거냐, 뿅.
우성
아, 저 중학교 때 애들이 저 재수없다고 따돌렸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찜질방 갈 기회가 없었어요.
명헌, 갑자기 구운 계란을 정우성의 이마에 딱 내리친다.
우성
아야!
명헌
(껍질을 벗긴 계란을 내밀며)
먹어라, 뿅.
계란을 입에 넣고 와구와구 씹던 정우성은 이명헌이 방심한 사이에 계란을 들고 다가간다.
내리치려는 순간 이명헌이 정우성의 팔을 홱 붙잡아당긴다.
명헌 위로 얼떨결에 엎어진 우성. 음악이 흐르며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서둘러 후다닥 떨어지는 우성과 명헌. 서로 식혜를 마시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힌다.
CUT TO.
나란히 누워 찜질방 천장을 바라보는 두 사람. 우성은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이 기분을 떨치기 위해 먼저 말을 걸어본다.
우성
선배.
명헌
뿅.
우성
저 자꾸 오디션에서 떨어뜨리는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돼요?
명헌
......
우성
붙여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냥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요.
명헌
......
우성
아니, 그냥 붙여주면 안 돼요? 솔직히 지금도 부원이나 다름없잖아요.
명헌
......
우성
아니, 아니다. 그냥 붙여주지 마요.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합격할 거예요.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던 명헌.
명헌
넌 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어, 뿅?
우성
(당연하다는듯) 산왕이 제일 유명하니까 그렇죠. 전국 대회에서 대상도 받고. 연기하는 애들 중에 산왕 모르는 애들도 있어요?
명헌
넌 그동안 연기 연습할 때 어떻게 했냐, 뿅.
우성
연기 연습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냥 집에서 혼자 하거나 연습실 빌려서 연습했죠.
명헌
중학교 때도 동아리나 친구는 있었을 거 아냐. 같이 연기하는 애들이랑은 연습 안 했어, 뿅?
우성
(머쓱한 얼굴로)
아까도 말했잖아요. 애들이 저 별로 안 좋아했다고...... 그래서 대사만 외워가지고 대회날 처음 맞춰볼 때도 있었어요.
명헌, 정우성 쪽으로 돌아눕는다.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여는 명헌.
명헌
네가 했던 연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절절하게 감정을 토해내는 독백이었지, 뿅?
우성
네.
명헌
근데 네 연기에는,
우성
(침을 꿀꺽 삼킨다.)
명헌
사랑하는 사람이 느껴지지 않아, 뿅.
우성
네?
명헌
상대방이 없다고, 연기에. 투명인간처럼. 안 느껴져, 뿅.
우성
......
명헌
너 연기 잘해. 정말이야, 뿅.
그런데 아무리 독백이라 하더라도 연기는 홀로 하는 게 아니야. 연기는 reaction과 같은 거야.
연기는, 혼자서만 빛나면 안 돼.
우성
......
명헌
그래서 널 떨어뜨렸다, 뿅.
우성,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다.
한동안 말이 없는 두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이명헌을 바라보던 정우성, 먼저 말을 꺼낸다.
우성
선배.
명헌
뿅.
우성
나중에 우리, 꼭 시라노 보러 다시 와요.
눈을 떠서 정우성을 바라보는 명헌. 정우성은 옆으로 쪼그려 누운 채 명헌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다.
우성,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명헌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걸다가 정우성의 새끼 손가락을 뒤로 꺾는다.
우성
아, 아아아아! 아야! 아 쫌!!!
#35 시라노 극장 안 - 현재, 밤
가만히 극이 시작되길 기다리던 명헌, 갑자기 곤란한 얼굴로 성희에게 말한다.
명헌
성희 씨. 제가 두통이 너무 심해져서요, 오늘 연극은 못 볼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천천히 일어서는 명헌. 당황한 성희, 엇 네네. 하면서 같이 일어선다.
각자의 위치에 숨어 있던 산왕 단원들, 서로 눈짓을 분주하게 보낸다.
낙수
(송신기로)
야 정우성. 니가 이 계획 백 퍼센트 통한다며. 이제 어쩔 거야.
우성
제가 언제 백 퍼센트 통한댔어요. 이거면 통할 줄 알았죠, 저도.
정우성, 불만스러운 듯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이 묘하다.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섞인 모습이다.
동오
우성아 어떡할까. 고전으로 갈까? 한 우산 쓰기?
우성
(급하게 송신기로)
성희 씨. 내 말 들리죠? 일단 다음 단계로 갈게요.
그러나 명헌은 자신이 갖고 온 남색 우산을 성희에게 쥐어주고 택시를 태워 보낸다.
현철
야, 야. 철수하자, 철수. 오늘은 텄다.
각 위치에서 한 곳으로 모인 산왕 단원들. 춥다고 부르르 떨며 옹기종기 모인다.
성구
(담배를 피우며)
추우니까 택시 타고 가자. 정우성! 얼른 와.
연두색 우산을 들고 밍기적거리던 우성, 갑자기 과장되게 콜록거리는 소리를 낸다.
우성
콜록콜록! 아 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전 먼저 가볼게요! 내일 봬요!
#36 주택가 골목
명헌, 서류가방으로 머리 위를 가리고 비를 맞으며 걷는다. 누군가 미행하는 듯한 스산한 분위기. 뒤를 돌아본 명헌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우측 주택가 길목으로 접어들려는 찰나, 챙모자를 깊게 눌러쓴 키가 큰 남자와 부딪힌다. 명헌은 깜짝 놀라 서류 가방을 떨어뜨릴 뻔한다.
명헌
괜찮으십니까?
자신과 부딪힌 키 큰 남자에게 정중하게 말하는 명헌. 그때 키 큰 남자가 어색하게 바꾼 저음의 목소리로 말한다.
우성
이 우산 쓰세요.
우성, 우산을 명헌의 가슴으로 억지로 떠넘기고 후다닥 뛰어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명헌, 천천히 연두색 우산을 펴서 쓰고 걸어간다.
#37 산왕 사무실 - 다음 날, 낮
약한 감기 기운에 코를 훌쩍거리는 정우성.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열띤 기색이다.
현철
감기 걸렸냐? 그러게 택시타고 가자니까.
우성, 타박에 신경쓰지 않고 대걸레로 힘주어 바닥을 닦는다. 그때 문자 오는 핸드폰 알림.
핸드폰을 꺼내든다. Close-Up. 성희에게 온 메시지.
[이 대리님 감기 걸리셔서 오늘 회사 못 나오셨어요 ㅠㅠ 어떡하죠?]
대걸레 자루를 바닥에 쓰러뜨린 우성, 곧바로 문밖에 달려나간다.
우성
잠깐만 외출 좀 하고 올게요!
#38 명헌의 집 앞
따뜻한 모과차와 약이 든 봉지를 들고 작은 빌라 앞에 서 있는 우성.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안에 들어간다.
CUT TO.
404호 앞에 도착하지만 다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다. 약을 어떻게 전해줘야할지 방법을 모르겠다. 이리저리 문앞을 걸어다니며 고민하다 문고리에 걸어두기로 결심하는 우성.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명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난다.
우성
(깜짝 놀라며) 으악!
혼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하던 정우성은 명헌이 가만히 있자 뻘쭘해진다. 둘 사이에 침묵과 무형의 언어들이 흐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명헌이다.
명헌
어제 우산 고마웠다.
우성
(당황하며)
네? 그거 저 아닌데요.
명헌
(살짝 웃으며)
연기 잘하는 애가 거짓말 못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우성, 부끄럽고 쪽팔린 마음에 목이 벌겋게 물든다.
그런 우성에게 명헌이 안으로 들어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뒤로 물러서며 말한다.
명헌
잠깐 들어올래?
머뭇거리던 우성, 약봉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39 명헌의 집 안
거실로 들어섰다. 흰 벽에 베이지색 소파, 관엽 식물 화분 몇 개와 원목 가구가 인상깊게 배치된 깨끗한 공간이다.
명헌
손에 든 건 뭐니?
우성
(퉁명스럽게)
아, 이거...... 선배 혹시 감기 걸렸을까 봐......
약을 받아드는 명헌. 질문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아무렇지 않게 약봉지를 받아든다.
명헌
고마워.
약을 꺼내 물과 함께 먹고 모과차 뚜껑을 따는 명헌
명헌
뭐 마실래? 커피? 차?
우성
됐어요. 저 금방 나가봐야 해요.
얼마 안 있어 따뜻한 차 한잔을 내오는 명헌. 캐모마일 차다.
명헌
날이 쌀쌀하니까 차라도 마시고 가.
소파에 앉은 둘은 말없이 차를 마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심장이 터질만큼 물어보고 싶은 것투성이다. 제 옆에 앉은 이 사람이 지극히 미운데 막상 아픈 모습을 마주치니 탓 할 수 없다. 무슨 질문을 할까 고민하던 우성은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음부터 해소하기로 한다.
우성
요즘은 뿅 안 써요?
명헌
내 나이가 몇 갠데. 뿅뿅거릴 나이는 지났지 않았나?
우성
......
그 말에 우성이 묘하게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명헌
너는. 아직도 연기해?
우성
네. 뭐...... 비슷한 거 해요.
명헌
그렇구나
우성
......선배는요?
명헌
나? 난 그만뒀지.
우성
왜요?
명헌
고등학교 때 실컷 해본 걸로 만족하려고.
다시 침묵이 흐른다. 비로소 침착해진 정우성은 흘끗흘끗 이명헌을 바라본다. 연극부 시절과 달리 머리가 길고 그윽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명헌의 모습이 낯설다. 손바닥이 괜히 간질거린다.
우성
시라노......
명헌
응?
우성
시라노는 봤어요?
우성조차도 생각지 못한 질문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명헌, 나직하게 대답한다.
명헌
아니.
우성
왜요?
핸드폰 벨소리가 갑자기 울린다. 명헌의 것이다. 전화를 받아드는 그.
명헌
네네 성희씨? 네. 아 네 저 괜찮습니다. 이제 막 약 먹었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네.
성희란 이름을 듣고 불편한 표정을 짓는 우성.
우성
누구예요?
명헌
아 회사 후밴데,
우성
애인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이 튀어나간다.
명헌
아니, 뭐...... 아직은.
우성
아직은? 오, 선배도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긴 한가 보네요.
명헌
......
우성
사람은 괜찮아요?
명헌
어, 좋은 사람이야.
정우성,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한다. 이제야 서서히 이 사람과 재회한 게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더욱 화가 차오르는 우성. 벌떡 일어서서 차갑게 대꾸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우성
둘이 잘 됐으면 좋겠네요.
명헌
......
우성
전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문을 쾅 닫고 나오는 정우성. 비가 온다. 비오는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는 정우성.
#40 시라노 극장 밖 - 20대 초반 정우성.
비내리는 하늘 MATCH OUT.
우성, 시라노 포스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41 극장 안 20대 초반의 정우성.
연극 시라노가 공연되고 있는 가운데 홀로 관객석에 앉아 있는 정우성.
다른 관객들과 달리 텅 빈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42 극장 밖 - 연극이 끝난 후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20대 정우성, 홀로 비를 맞고 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우성. 낡은 리락쿠마 인형 키링이다. 리락쿠마 인형 키링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옆의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린다.
쓸쓸하게 젖은 채 걷는 뒷모습 풀샷.
#43 산왕 사무실 - 현재, 낮
여느 때와 다르게 다운된 우성의 얼굴에 눈치를 보는 산왕 단원들. 각자 할 일을 하던 도중 성희가 문을 열고 찾아온다. 소파에 앉으며 울상을 짓는 성희.
성희
이 대리님히고 친해지긴 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빨리 연애하고 싶어요.
성희의 말에 단원들 전부 시선을 우성에게 돌린다.
우성, 어딘지 넋을 놓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보다못한 현철이 말한다.
현철
우성아. 네가 기획 맡는 거 힘들면 그만둘래? 형들이 대신 알아서 할 수 있어.
우성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우성
아뇨. 제가 할게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제가 해낼 거예요.
고개를 번쩍 든 우성이 성희의 폴더폰을 뺏어 통화목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명헌이 수신자인 메시지란에 이렇게 입력한다.
[이번 주 토요일에 대학로에서 보지 않을래요?]
사람들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송버튼을 꾹 누른다.
우성
정공법으로 가 보죠. 명헌이 형의 추억이 담긴 곳에서.
#44 대학로 - 주말, 낮
다행히 맑게 갠 하늘이다. 주말이라 북적이는 대학로 거리.
현철
자, 집중하자 다들.
한손에 무전기를 쥔 현철이 단원들을 격려한다. 손을 모으고 산왕!을 외친 단원들이 뿔뿔이 자기 자리로 흩어진다.
대학로 맥도날드 앞에서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명헌. 성희의 의상과 메이크업을 체크한 우성이 성희를 명헌에게 보낸다.
음악이 흐르며 대학로 거리를 거니는 명헌과 성희 풀샷.
우성
먼저 성희 씨. 명헌 선, 아니 명헌 씨한테 배고프다고 말하면서 버거킹을 가리키세요. 메뉴는 데리야끼 치킨 버거로요.
우성이 시키는 대로 버거킹을 가리키는 성희.
성희
명헌 씨. 우리 저기서 점심 먹는 거 어때요? 저 데리야끼 치킨 버거 먹고 싶어요.
성희의 말에 옛날보다 외관이 많이 낡은 버거킹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명헌.
명헌이 매너 있게 거절한다.
명헌
이런 패스트푸드보다 더 좋은 거 먹어요, 우리. 제가 좋은 곳 알아요.
버거킹 대신 파스타 가게를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
낙수
얌마. 데이트하는데 버거킹이 뭐냐?
낙수의 타박. 그러나 우성은 아무런 말이 없다.
CUT TO.
파스타 가게를 나오며 산책을 하는 명헌과 성희.
이번엔 오락실이 가까워져오자 우성이 신호를 보낸다.
성희
명헌 씨. 저 농구기계 재밌어 보여요. 우리 한 번 해봐요.
CUT TO. 농구 기계 앞
성희
우리 게임해서 진 사람 소원들어주기 해요. 어때요?
명헌
......이긴 사람이 아니라요?
성희
네! 이긴 사람 소원들어주는 건 너무 뻔하잖아요.
잠자코 있던 명헌은 자연스럽게 옆의 인형뽑기 기계로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명헌
......제가 지금 손목이 안 좋아서. 대신 저 인형뽑기하는 건 어떨까요?
#45 마로니에 공원 야외 공연장
산왕이 미리 섭외해 놓은 밴드가 무대를 하고 있다.
성희
(명헌의 팔을 잡아 끌며) 이거 우리 듣고 가요!
함께 사람들 사이에 서는 성희와 명헌.
마침 노래를 끝낸 밴드가 스탠딩 에그의 '사랑한다는 말'을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를 다 부른 밴드 가수가 진행 멘트를 한다.
밴드 가수
여기 커플 없으신가요? 커플! 커플 나오시면 저희가 두 분을 위해 노래 노래 불러드릴게요.
가수가 두리번거리더니 명헌과 성희를 콕 집는다.
밴드 가수
두 분! 두 커플 분 나오세요, 이리로!
밴드 가수의 성화에 앞으로 나오는 성희와 명헌
밴드 가수
두 분 사귀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제가 보기엔 갓 사귄지 얼마 안된 커플 같은데요!
갑자기 밴드가수가 박수를 치면서 호응을 유도하기 시작한다.
밴드 가수
뽀뽀해. 뽀뽀해.
다같이 뽀뽀해를 외치는 구경꾼들. 당연히 구경꾼들도 동오가 섭외해 놓은 사람들이다. 중간 중간 동오와 성구도 서서 "잘 어울려요!"를 외친다.
부끄러운 듯이 명헌을 바라보는 성희와 가만히 서 있는 명헌.
그때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벼락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장비가 젖을까 봐 허겁지겁 철수하는 밴드맨들과 뿔뿔이 흩어지는 구경꾼들. 명헌도 성희를 데리고 급히 택시를 잡는다. 택시에 함께 올라타는 두 사람.
동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다 안 풀리는 느낌이냐. 명헌이는 자꾸 퇴짜를 놓질 않나, 이젠 천둥번개에 소나기야?
잠깐, 정우성 이 자식은 또 어디로 간 거야?
#46 이명헌 집 빌라 근처
빌라 근처 골목 사각지대에 몰래 서서 서성거리는 우성. 우산도 없이 장대비를 맞으며 빌라 쪽을 바라보고 있다.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진다. 이를 딱딱 부딪히며 건물 벽에 몸을 숨기고 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머리 위로 연두색 우산을 씌운다. 깜짝 놀라 뒤를 도니 익숙한 얼굴이다. 빗물의 찬기 때문에 희게 질린 얼굴이 붉어진다. 우성은 명헌의 집을 염탐하고 있던 자신이 무슨 질문을 받을지 두렵다.
그때 명헌이 조용히 말한다.
명헌
이러다 감기 걸려. 잠깐 우리 집에 와서 씻고 가.
우성
시, 싫어요. 제가 선배 집에서 왜 씻어요.
이명헌이 손등을 우성의 이마 위에 대본다. 정우성은 얼른 몸을 뺀다.
명헌
미열이 있네. 집에 들러서 차 한 잔 마시고 네 우산도 챙겨 가.
우성
......
명헌
얼른.
우성은 명헌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빌라로 따라 들어간다.
#47 명헌의 집 안
검정 추리닝을 건네주며 방에 딸린 화장실을 가리키는 명헌.
명헌
저기가 욕실이야. 씻고 갈아입고 나와.
CUT TO.
뜨거운 김과 함께 욕실에서 나오는 우성. 검정 추리닝을 입고 수건으로 말릴 것 없는 빡빡이 머리를 대충 턴다.
비로소 처음 들어와보는 명헌의 방이다. 베이지색 이불로 뒤덮인 침대와 같은 색상의 책상, 그 위론 데스크탑이 놓여 있다. 호기심에 흘끗 방안을 훔쳐 보던 정우성의 시선이 불현듯 한 곳에 쏠린다. 데스크탑 받침대 옆엔 아주 낯익은 인형 하나가 놓여 있다.
바로 파란 스티치 인형 키링이다.
우성은 떨리는 손으로 키링을 집어든다.
우성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10년 전, 대학로에서 리락쿠마와 함께 샀던 인형 키링이다.
키링을 쥐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을 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명헌이 뒤에서 조용히 나타난다.
그는 가만히 우성의 등을 끌어안으며 말한다.
명헌
뜨레플레프의 독백은 계속 연습하고 있어?
우성
(떨리는 목소리로)
......뜨레플레프 독백은 왜요.
명헌
너 잘하잖아, 그거.
우성
......저 그 독백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안 한지 오래 됐어요.
우성은 상처로 얼룩진 얼굴로 명헌을 뿌리치려 한다.
명헌
오랜만에 보고 싶다. 날 위해 해줄 수 있니, 뿅.
우성은 손 안에 든 파란색 스티치 키링을 꽉 쥔다. 명헌에게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뒤를 돈다. 온갖 감정이 들끓는 듯한 눈을 한 우성은 명헌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는 시선을 명헌에게서 절대로 떼지 않으며 입을 연다.
우성
......나는 당신을 저주하고 증오해서 당신의 편지와 사진은 모두 찢어버렸어.
그렇지만 내 마음이 영원히 당신에게 묶여 있는 것은 늘 알고 있었어.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멈출 힘이 내겐 없어.
그가 떨리는 한 쪽 손을 들어올려 명헌의 뺨을 어루만진다.
우성
당신을 잃은 이후로 내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어.
나는 고통 속에 살고 있어.
젊음은 내게서 사라져버린 듯해. 마치 아흔 살 노인이 된 기분이야.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이 걸었던 땅에 입을 맞춰.
두 사람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진다.
정우성이 속삭인다.
불가항력이다.
우성
어디를 보아도, 나는 당신의 얼굴이 보여.
그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비추던 그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48 Fade to: 학교 구령대 - 밤, 18세
18세 우성과 명헌, 둘은 학교 구령대에 나란히 앉아 명헌이 가져온 유부초밥을 나눠먹고 있다.
우성
이렇게 있으니까 여기가 마치 무대 같아요.
기분이 좋아진 우성, 히히 웃으며 말한다.
명헌
구령대 뿐민 아니라 인생이 곧 무대인 법, 뿅. 모두 무대 위에서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고 사랑을 하지.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냐, 뿅.
우성
오올. 형 멋있는 말 쩌네요.
명헌, 콧방귀를 뀌며 뒤로 벌러덩 드러눕는다. 덩달아 같이 드러눕는 우성.
우성
형.
명헌
뿅.
우성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형은 시라노처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대신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명헌
아니, 뿅.
우성
왜요? 시라노에선 결국 여주인공이 잘생긴 애랑 이어지잖아요. 시라노가 쓴 편지 덕에요. 이것도 일종의 연출 아닌가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멋진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상대방의 니즈에 맞는 행동들을 하면 충분히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명헌
그렇게 만들어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겠냐, 뿅.
우성
사랑이 뭐 별건가요.
명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뿅.
우성
그럼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오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로 흐르고 밤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명헌
넌 운명이란 걸 믿니, 뿅.
우성
음... 아니요. 전 운명을 믿지 않아요. 운명이 있으면 내 맘대로 아무것도 못할 거 같잖아요.
명헌
난 믿는다, 뿅. 난 궁극적으로 인간들은 사랑이란 것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뿅. 우리가 매일 공부하는 대본에 온통 사랑이야기가 가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뿅. 대본처럼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게 바로 운명 아니겠냐, 뿅.
우성
운명......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없이 명헌을 바라본다. 명헌의 말을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하다.
명헌
(몸을 일으키며)
오늘은 여기서 오디션 볼래, 뿅?
우성
(놀라며)
여기서요?
명헌
(몸을 일으키며)
어떠냐 뿅. 네가 무대같다고 하지 않았냐, 뿅.
우성은 멋쩍게 일어나 명헌 앞에 선다. 큼큼 목을 가다듬는다.
밤이라 목소리가 크게 들릴까 봐 소근대듯 독백 대사들을 내뱉는다.
정성을 다해 애절한 마음으로 독백 연기를 하는 우성.
카메라, 두 사람을 번갈아 비추며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성
어디를 보아도, 나는 당신의 얼굴이 보여.
그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비추던 그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마지막 대사를 뱉었을 때, 우성은 저도 모르게 명헌을 바라보며 대사를 속삭인다.
독백을 마쳤음에도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괜히 민망해진 우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명헌의 곁에 앉는다. 침묵을 지키던 명헌은 작게 한숨을 토해내듯 말한다.
명헌
......연습 많이 했나보네...... 뿅.
우성
사실 최근엔 연습 안 했는데...... 전보다 좀 나아졌나요?
명헌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내도록, 뿅.
우성
일요일엔 왜요?
명헌
시내로 나가서 깐풍기 먹게, 뿅.
우성
깐풍기요?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로) 그럼 형이 사는 거예요? 저 합격인 거 맞죠?!
우성은 환하게 웃으며 기뻐한다.
어느덧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바닥을 짚은 손끝이 살짝 닿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이상하고 손끝이 간질거려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웃음을 짓는다.
이윽고 서로 입술을 맞대는 우성과 명헌
#49 Fade to: 명헌의 방 안, 현재
입술을 맞대고 있는 우성과 명헌 MATCH OUT.
#50 중식당, 현재
온통 벽이 빨갛고 위에 홍등이 듬성듬성 걸려 있는, 허름한 중식당이다.
깐풍기를 가운데에 놓고 할 말을 찾는 두 사람. 아까의 입맞춤 덕택인지 눈을 좀처럼 마주하기 어렵다. 우성이 먼저 소주를 명헌의 반쯤 남은 잔에 따라주며 대화를 시도한다.
우성
선배 혼자 자취하는 거예요?
명헌
응.
우성
부모님은요?
명헌
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지금 본가에서 혼자 사셔.
우성
아...... 죄송해요.
명헌
괜찮아. 본가랑 회사랑 멀어서 얼마 전에 혜화역 근처로 이사왔어.
우성
그렇구나......
두 사람은 소주잔을 맞대고 입에 소주를 털어넣는다.
우성
선배.
명헌
응
우성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다고 했죠.
명헌
뭐, 비슷해.
우성
선배가 좋은 사람 같다고 했었죠.
명헌
음.
생각에 잠긴 명헌은 소주잔에 든 소주를 다시 삼킨다.
명헌
어머니가 요즘 자꾸 선봐서 결혼하라고 성화여서, 이 친구랑 진지하게 만나야 하는 건가 고민은 되네.
우성은 소주를 마시며 쓴 표정을 짓는다.
우성
선배가 그랬잖아요. 선배는 운명적 사랑을 믿는다고.
명헌
내가 그랬었나? 별 소릴 다 했네.
지금은 그냥 적당히 좋은 사람 만나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고 있어.
우성
(울컥한 표정으로)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명헌
엄밀히 말하면 아니지.
우성
근데 왜 해요?
명헌
......
우성
전요, 전 여전히 운명적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랑이란 것도 한꺼풀 까보면 전부 별 거 없거든요.
명헌
......
우성
선배. 사실 말이에요. 제가요,
여기까지 말한 우성은 입을 벌렸지만 무언가를 꾹 삼키듯 입을 꾹 다문다. 털어놓고 싶은 것도, 캐묻고 싶은 것도 많지만 막상 이명헌의 말을 들으면 제 안의 감정이 봇물 터질까 봐 두렵다.
우성
시라노는 왜 안 본거예요.
명헌
......
명헌에게선 한동안 말이 없다.
명헌
......약속했었으니까.
우성
무슨 약속이요?
명헌
같이 보기로 한 약속.
우성
(울컥하며)
약속을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왜......
명헌
대신 오늘 깐풍기는 내가 살게.
봐 줘, 뿅.
명헌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정우성의 한 쪽 손을 감싸쥔다.
우성
짜증나 진짜......
그의 얼굴이 누그러진다.
우성
이번 주말에 시간 돼요?
명헌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
우성
그럼 잠깐 시간 좀 비워줘요.
명헌
왜?
우성
데이트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어디 같이 갈 데 있어서 그래요.
우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툴툴대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을 뒤집어 명헌의 손을 같이 쥔다.
명헌, 대답대신 감싸쥔 손에 힘을 준다.
#53 명헌의 집 안
거울을 보며 머릿결을 정리하는 이명헌은 시계를 보며 부지런히 가방을 챙겨든다.
신발을 반쯤 신다만 명헌은 무언가를 잊은듯 다시 안으로 들어와 향수를 칙칙 뿌린다.
손목의 향을 맡고 만족한 얼굴을 하는 명헌.
#54 대학로 사거리
약속 장소를 향해 길을 걷는 명헌은 어딘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55 대학로 극장 앞, 오후 4시 경
대학로 극장 앞에 30분 일찍 도착했다. 명헌은 우뚝 서서 약속 상대를 기다린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약속 시간인 4시가 되었다. 명헌은 자세를 더욱 바로하고 기다린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약속상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손우산을 피며 이리저리 뛴다.
가져온 연두색 우산을 피고 대학로 극장 앞에 서 있는 명헌.
간간히 시계를 보며 거리로 시선을 던지고 가끔씩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관객들이 차례대로 극장 안에 들어가려고 하자 옆으로 비켜난다.
CUT TO.
어느덧 하늘의 색깔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시간은 흘러 오후 7시가 된다. 극장 안으로 들어갔던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명헌은 꿈쩍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다.
바로 그 때 명헌이 서 있는 대학로 극장의 대각선 건너편 건물 앞에 서 있는 우성.
빗살은 점점 거세지고 있으나 내리는 비를 오롯이 다 맞고 있다.
자신을 기다리는 명헌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낸다.
시라노 예매 티켓이다.
비에 젖어들어가는 티켓 두 장.


